서랍장이 하는 말
4월과 10월 매년 두 번, 서랍장을 뒤집는다. 입었던 옷을 정리하고 시작되는 계절에 맞춰 봉인해 뒀던 옷을 꺼내 차곡차곡 서랍에 넣는다. 지난봄 날씨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기도 했고 체력의 여분과 마음의 여유가 없어 얼마 전에야 옷을 정리했다. 이번엔 스케일이 달랐다. 헌 집을 허물고 새집에 들어오며 새 가구들 사이 서랍장도 함께 왔다. 내가 나이가 든 만큼 서랍장도 성실하게 나이를 먹었고, 내 몸이 여기저기 고장 난 것처럼 서랍장도 아픈 곳이 많았다. 레일이 빠지고, 손잡이가 헐렁하다 못해 돌아갔다. 서랍장 크기에 맞춰 옷 개수를 유지하려고 해도 워낙 작아 겨울 니트 몇 벌을 넣으면 소화불량을 일으켰다. 낡고 작은 서랍에 옷을 구겨 넣다가 화딱지가 나서 곧장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후임자를 물색했다.
독립을 한 것도 아니니 제대로 된 가구를 산 건 거의 처음이었다. 디자인도 소재도 가격도 천차만별. 하지만 내게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예산에 맞춰 무난한 디자인의 가성비 좋다는 브랜드 제품을 고르면 됐다. 그 기준에 맞춰 후보가 추려졌고 그중 후기와 배송이 무난한 브랜드에 제품을 구매했다. 여기까지는 일사천리. 하지만 큰 산이 남아 있었다. 오래도록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던 낡은 서랍장을 꺼낼 때 마주해야 할 풍경이 눈에 그려졌다.
먼지는 둘째치고 서랍장 뒤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곰팡이가 벽을 채우고 있는 건 아닐까? 끔찍한 풍경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서랍장이 말썽을 부린 건 오래전에 깨달았지만, 그 최악의 상황이 두려워 미루고 피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NN년이 지났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진짜 어려운 건 최악을 해결하는 일 보다 오히려 마음먹는 일이라는 걸. 그 어려운 마음을 먹었으니 일단 실행해 보기로 했다.
연휴가 껴서 2주는 걸릴 거라는 쇼핑몰 공지와 달리 주문한 지 이틀 만에 배송 기사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익일 오전 7시~8시 사이 배송 예정] 네? 새벽 7시요? 내가 그 문자를 받은 건 금요일 오후. 내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0여 시간. 퇴근 후 집에 가서 옷을 빼고 전임자를 들어내고 그가 있던 자리를 청소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마음은 급한데 업무는 쌓여 있고, 좀처럼 내 발목을 놔주지 않았다. 번갯불에 콩을 튀겨먹듯 후다닥 마무리하고 집에 도착했지만 작고 귀여운 내 체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분명 퇴근 후 지하철을 탈 때까지만 해도 집에 가서 뭐부터 정리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계산했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는 에너지가 방전이었다. 주중에 바닥까지 싹싹 긁어 쓴 탓이다. 엿가락처럼 늘어진 몸을 결국 다시 일으키지 못하고 그대로 뻗었다. 잠에 영혼이 빨려 들어가면서도 생각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충분할 거... 야... 설익은 잠꼬대를 하며 잠에 빠져들었다.
찝찝한 마음으로 잠이 들어서였을까?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 눈이 번쩍 떠졌다. 시간을 확인하자마자 이부자리에서 몸이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부지런한 기사님은 곧 오실 테니 나는 빠르게 준비해야 했다. 일단 대형 비닐봉지에 칸 별로 넣어둔 옷을 꺼내 담았다. 그리고 서랍 하나하나 꺼내 마당에 내놓았다. 마지막으로 서랍장을 옮긴 후 드디어 수 십 년간 피해 왔던 현실과 마주했다. 먼지와 잡동사니 그리고 어쩌면 곰팡이나 벌레 사체가 있을지 모르는 그곳... 은 응? 의외로 멀쩡했다. 워낙 서랍장을 벽에 바짝 붙여 놔서인지 쌓인 먼지와 틈 사이로 넘어간 동전 몇 개, 오래된 탁상 달력 이외에 봉인된 존재들은 없었다. 벽지 색이 바랜 것 빼고는 비교적 멀쩡했다.
최악을 상상했던 내게 오히려 이만하면 괜찮은데?라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이게 뭐라고 나는 아침, 저녁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았을까? 의외의 반전엔딩에 허탈해졌다. 하루에도 서너 번 열고 닫을 때마다 새 서랍장이 하는 말이 귀에 들린다.
무서울 거 같아서,
더러울 거 같아서,
피곤할 거 같아서,
귀찮아질 거 같아서
일단 피하고 봤던 많은 것들의 뒤에는
어쩌면 의외로 심플한 결론이
널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