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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May 08. 2023

효도왕 되기 참 쉽죠?

스티커로 하는 효도

샴푸를 주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환절기라 그런지 자꾸 머리카락이 빠진다는 엄마. 며칠 전, 미용실에 갔다가 들은 미용사의 한마디가 엄마의 마음을 후벼 팠나 보다. 평소 동년배에 비해 머리숱만큼은 풍성하다고 자부했던 엄마였다. 그런데 미용사는 이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정수리가 휑하다며 관리 좀 하셔야겠다며 덧붙인 걱정 섞인 한마디가 굳게 닫혔던 엄마의 지갑을 열게 했다.      


평소 엄마는 번화가 화장품 가게의 매대에 놓인 대용량 샴푸를 애용했다. 브랜드도 성분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가격 대비 양. 가성비가 샴푸 선택의 기준이었다. 나야 일찌감치 샴푸 독립을 단행해 내 머리카락이나 두피 컨디션에 필요한 샴푸를 골라 썼다. 하지만 엄마와 아빠, 동생은 엄마가 사 오는 대용량 샴푸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용했다. 그러다 엄마 역시 탈모 관리의 필요성을 느끼고 '머리카락 안 빠지게 한다는 샴푸‘를 주문하라고 한 것이다.     


어릴 때부터 풍성한 머리숱을 부러워했지만 타고나기를 얇고 힘없는 머리카락 가졌다. 그래서 두피 강화나 탈모 방지 샴푸 세계를 수없이 탐험하다 최근 L샴푸에 정착했다. 수없이 재구매했다. 다른 제품을 썼다가도 그만한 제품이 없어 연어처럼 다시 돌아오는 브랜드였다. 드라마틱한 효능을 체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딱히 바꿔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해 정착 중이다. 긴 고민하지 않고 내가 쓰던 소용량보다 큰 대용량 샴푸로 주문했다. 이제 우리 가족은 모두 L샴푸를 쓰게 된다.     


며칠 후 주문했던 샴푸가 도착했다. 비닐 포장지를 최대한 배제한 센스도 여전하다. 그런데 박스를 열자 못 보던 선물이 하나 들어 있었다. 이름하야 효도 스티커.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 바디워시, 클렌징폼이 한글로 적힌 스티커였다. 맨 아래에는 효도 스티커의 탄생 배경이 적혀 있었다.     


[효도 스티커의 탄생 배경]

얼마 전에 부모님 댁에 갔는데, 엄마가 그러더라고요.
“요즘은 다 영어라 뭐가 샴푸고 뭐가 린슨지 모르겠어 답답해 죽겠어~”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부모님 샴푸에 하나씩 붙여드리고 효도왕 되세요!   

  

어떤 사람이 생각해 낸 건 지 몰라도 ’참 잘했어요 ‘ 도장을 쾅 찍어 주고 싶은 아이디어였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노년의 부모님과 살면 한 번쯤 경험했을 일이다. 나 역시 부모님과 해외여행 때 경험했다. 숙소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욕실에 들어가 온통 외국어로 쓰인 샴푸통, 린스통, 바디샤워 통을 구분해 어떤 게 샴푸고 어떤 게 린스인지 체크해 부모님께 알려 드린다. 머리끈이라도 있으면 하나 둘러 두고 이게 샴푸라고 알려 드리고, 그마저도 없다면 샴푸를 바닥에 내려놓고 위치를 분리해 알기 쉽게 알려 드린다. 그게 외국이어서 그랬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집의 욕실에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똑같이 생긴 통모양에 온통 꼬부랑글씨로 쓰여 있어서 샴푸로 착각해 린스를 짜고 샴푸를 해도 거품이 안 난다고 화를 내던 아빠. 참다못해 아빠는 샴푸 통에 손수 매직펜으로 [샴푸]라고 적었다.     


스티커를 보자마자 일련의 사건들이 떠올랐다. 꼭 부모님이 아니더라도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아이나 어르신들에게 외국어 투성이 포장지는 뜻밖의 지뢰가 될 수 있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만든 스티커 하나로 효도왕이 되다니, 효도하기 참 쉬운 세상이다.      


가정의 달, 5월. 결혼을 하지 않았으니 아이가 없어 어린이날은 부모님을 졸라 중국 음식이나 피자를 먹는다. 철없는 장난에 엄마 아빠도 못 이기는 척 계산을 한다. 어린이날은 그저 거들뿐, 일찌감치 이 땅의 모든 딸, 아들들은 어버이날을 준비한다. 이때쯤에는 서로 어버이날 어떤 선물을 할지 계획을 묻고 상황을 체크한다. 봉투에 얼마를 넣어야 할지, 어떤 선물을 해야 할지, 어디서 식사를 할지 계획한다. 1년에 한 번이라도 부모님을 생각하는 날이 있다는 게 의미가 있다 싶기도 하지만 솔직히 부담스럽다. 어버이날 무렵이면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효도란 뭘까?   
   

새로 도착한 샴푸에 효도 스티커를 붙이며 생각했다. 효도란 이렇게 부모님 곁에서 필요한 걸 챙겨 드리며 불편함 없이 지내도록 살피는 게 아닐까? 물론 두둑한 봉투나 명품 가방도 좋고, 귀한 건강식품도 좋다. ’ 어버이날‘이라는 이름에 짓눌려 자동판매기처럼 툭 던지고 마는 선물보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는 일 그게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라고 스티커 하나로 효도왕 타이틀을 따낸 나는 끊임없이 자기 합리화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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