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코끝을 스칠 때 마시는 코코넛 커피 한 잔
대외적으로는 그럴싸한 ‘효도여행’이었지만 흑심은 따로 있었던 베트남 여행. 일단 한국을 박차고 나가고 싶어서 가진 돈과 시간 여유를 몽땅 끌어다 15일 일정으로 70대 부모님과 함께 베트남으로 향했다. 절반을 하노이, 나머지를 아빠의 군시절이 담긴 도시 퀴논에 머무를 계획이었다. 처음엔 일주일가량 하노이에서 뭘 하나 싶었다. 사람 북적이는 관광지는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여행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니 그들의 컨디션과 취향에 맞는 곳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배치했다. 향이 강한 현지식을 잘 드시지 못하는 부모님을 위해 아침저녁은 레지던스에서 밥을 해 먹고, 그 외에는 한식, 중식, 일식당을 번갈아 다녔다. 베트남에 왔는데 제대로 된 노상 쌀국수는 단 한 번도 먹지 못했던 한 편으로는 슬픈 여행이었다.
지극히 부모님 중심의 여행이었지만 단 하나! 카페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아시아의 손꼽히는 커피 천국에서 맛보고 싶은 커피가 많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검색 신공을 발휘해 기억에 남을 특색 있는 커피 명소를 찾아 구글 지도에 저장했다. 그 근처 여행지를 갔다가 짬이 나면 더위를 피해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즐겨찾기’의 별이 하나둘 쌓였다.
하노이 도착 둘째 날, 아침부터 서둘렀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그 카페’에 가기 위해 새벽밥을 해 먹고 시큰둥한 부모님을 떠밀며 숙소를 나섰다. 카페 오픈 시간은 8시. 늦어도 8시 20분에는 도착해야 했다. 미리 불러둔 택시를 타고 도로를 나섰는데 도로는 이미 만원이다. 등교와 출근을 하는 차와 오토바이로 아수라장이었다. 러시아워에 딱 걸린 거다. 자꾸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도로를 주시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베테랑 기사님은 꽉 막힌 도로 말고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늦지 않게 우릴 카페 입구에 내려줬다. 느릿한 부모님을 재촉하며 카페로 향했다.
도착한 카페에는 이미 적지 않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리도 그 사이 테이블을 차지하고 메뉴를 주문했다. 한국에서부터 이미 공부한 대로 코코넛 커피 두 잔과 엄마를 위한 망고 스무디를 시켰다. 답답한 도로 위에서 흘린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리자 직원이 분주하게 테이블과 의자를 가게 안쪽으로 살짝 밀어 넣고, 손님들에게 당부했다.
Be careful!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 멀리서 기차가 느릿느릿 달려오고 있었다. 그렇다. 이곳은 그 유명한 기찻길 카페 거리다. 하노이 호안끼엠 호수 인근, 약 300미터 길이의 기찻길 주변에 늘어선 주택들이 하나 둘 카페로 개조해 만들어진 곳이다. 색색의 조명이 이어진 카페에 앉아 코앞으로 지나가는 기차를 바라보는 것은 물론, 기차가 다니지 않는 틈에 선로 주변에서 사진을 찍는 게 인기 관광지다. 하지만 하노이 기찻길 카페 거리는 허들이 많다. 기차는 하루에 몇 번 오가지 않기 때문에 기차가 오는 시간에 맞춰 도착해야 하고, 안전상의 이유로 19년도와 22년도에 폐쇄되었다 열리고 거주민이 아니면 입장이 까다롭다.
사전에 알아본 대로 번잡하고 공안 검사도 잦은 하노이 구시가지 쪽 기찻길 카페가 아닌 하노이 기차역 아래쪽에 위치한 <Hanoi 1990s>라는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전날, 하노이에 도착하자마자 카페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내 기차가 도착하는 시간부터 문의했다. 찾아본 후기마다 기차 도착 시간이 달랐기 때문이다. 오전 8시 30분 첫 기차가 지나간다고 했다. 시간이 늦을수록 여행객이 북적일 테니 그나마 한적한 시간은 그때가 최선이었다. 아침형 아니 새벽형 인간인 부모님과 다니기에 딱 좋은 스케줄이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은 지 10분 만에 저 멀리서 육중한 몸체의 기차가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카페의 직원들은 사고를 대비해 자체 안전요원처럼 움직이며 사진 찍느라 정신 팔린 여행객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있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몸짓에서 이들이 얼마나 이곳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지 엿볼 수 있었다. 자칫 사고라도 나면 하루아침에 폐쇄가 될 테고 그 순간 일자리를 잃게 될 테니 무엇보다 ‘안전’이 중요했다.
신기한 광경에 부모님은 어깨를 잔뜩 움츠려 몸을 보호하며 기차를 구경했다. 멀리서 봤을 때는 느릿하다고 생각했는데 테이블에 닿을락 말락 하며 기차가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다 흐트러질 정도로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기차가 지나갈 때 손뼉 치며 어린아이처럼 신기해하는 부모님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는 시계를 되돌려, 처음 내가 기차를 탔던 날을 떠올려 봤다. 신난 나를 보는 부모님의 모습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한바탕 기차가 지나가자 직원들은 기계 같은 손놀림으로 안쪽으로 밀어 두었던 의자와 테이블을 기찻길 한가운데에 원상 복귀시켰다. 그리고 내 핸드폰을 빼앗다시피 낚아채 갔다. 그리고는 전문 사진가의 스킬로 최적의 사진이 나오는 포즈를 교정해 주며 우리 가족사진을 찍어줬다.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장쯤 갖게 되는 그 ‘인증샷’ 말이다. 프로다운 솜씨에 혼이 쏙 빠진 채 포즈를 취하고 나니 이곳을 오래도록 기억할 ‘인생샷’이 남았다.
하나둘 여행객이 떠나간 한적한 기찻길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코코넛 커피를 마셨다. 시원하고 고소한 커피로 아침의 소란을 잠재우고 인생샷을 품은 채 카페를 나왔다. 다시 택시를 타기 위해 기찻길을 따라 큰 도로로 향했다. 카페들이 늘어선 기찻길 초입을 지나자 평범한 가정집들이 나왔다. 빨래가 널려 있고, 바닥을 쓸고, 새장 속 새에게 먹이를 주는 소시민들이 살아가는 곳이었다. 하루에도 서너 번, 오가는 기차의 소음도 그저 삶의 일부가 된 사람들이 사는 곳을 지나 다음 여행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