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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Apr 02. 2024

싸함이라는 과학

침대와 싸함의 공통점

한결 따뜻해진 날씨 덕분일까? 말랑해진 기분으로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조용히 흥얼거리며 목적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멀리서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싸함을 감지하는 레이더망에 빨간불이 켜졌다. 경쾌하게 움직이던 발걸음의 템포를 서서히 낮췄다. 저 멀리서 걸어오던 사람이 가까워지자 아니나 다를까 말을 걸었다.      


저 잠깐... 인상이 참...


말을 다 맺기도 전에 ’ 괜찮습니다’를 내뱉고 빛의 속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익숙하다는 듯 그 사람도 다음 타깃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다. 싸함의 오라를 풍기던 사람은 흔히 말하는 사이비 종교인. 그 세계로 끌어들이기 위해 멀리서부터 나를 지켜보던 사람이다.       


사실 그 사람이 말을 걸기도 전에 특유의 싸함을 감지한 객관적 근거가 있었다.      


① 염색이나 펌을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은 질끈 묶은 생머리 ② 90년대로 회귀한 듯한 수수하다 못해 촌스러운 옷차림. ③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가방에 구겨 넣거나 손에 쥐고 있는 우산 ④ 종일 거리를 헤매느라 쌓인 피로로 묵직한 종아리와 낡은 운동화 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두꺼운 안경 너머로 보이는 공허한 눈빛   

    

나머지는 뭐 꾸미는 거에 관심 없는 사람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5번이 패션 문외한과 사이비 종교인을 가르는 결정타다. 눈빛을 보면 100% 알 수 있다.       


누군가 말했다. 싸함은 과학이라고. 뇌가 경험을 통해 쌓아 올린 데이터베이스를 기반으로 보내는 과학적 신호라는 의견에 격하게 공감한다. 오종종한 눈코입에, 덩치도 작고, 밋밋하게 생긴 인상 때문인지 번화가에 가면 사이비 종교인들의 단골 타깃이 됐다. 많이 잡혀 본 덕분에 일반인 사이에서 그들을 가려내는 눈이 생겼다. 사이비 종교 포교를 하려는 사람들을 피구 공 피하듯 요리조리 잘 피한다. 텅 빈 눈을 가진 사람에게 잡아먹힐 일을 사전에 막는다.      


비단 거리뿐 아니다. 집에서, 회사에서, 사회에서 불쑥 누군가가 내뿜는 ’ 싸함’을 느낄 때, 몸과 마음에는 경보음이 울린다. 전에 없던 냉랭한 반응, 묘하게 어긋나는 시선, 티키타카 없이 뚝뚝 끊기는 대화, 뜸해진 연락, 어렵게 만나 시간을 함께 보내더라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를 덮치는 헛헛함 등등 데이터베이스가 많이 쌓여 있지 않을 때는 그저 내가 예민한 탓인가?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싸함이 낳은 후폭풍을 수없이 마주했다. 탈 때부터 눈빛이 불안했던 승객은 지하철 객차 안에서 난동을 피웠고, 갈수록 약속을 소홀히 여기던 친구는 연락을 끊었다. 페이 지급일을 자꾸 미루던 회사 대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수를 탔다. 개막 초 분명 파이팅 넘치게 출발했지만, 어딘가 손발이 안 맞던 선수들은 결국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되고부터 내 예민함을 탓하는 버릇을 버렸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싸함은 나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는다. 싸함은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향해 보내는 생존을 위한 시그널이니까. 비상 경고음에 귀를 기울이고 대비하는 것만이 내 생존율을 높이는 길이다. 침대가 과학인 것처럼 싸함도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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