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지인처럼 '사는 여행'
한 때는 여행을 할 때면 늘 그런 욕심에 사로 잡혀 있었다. “현지인처럼 사는 여행”. 단 며칠 머무는 여행자 주제에 감히 현지인처럼 사는 여행을 꿈꿨다. 관광객이 차고 넘치는 여행지, 맛집을 가는 것은 “씅“에 안찼다.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다는 숨은 명소, 현지인들이 북적인다는 맛집에 가는 것에 묘한 성취감+우월감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뜨내기 여행자의 태생적인 한계 앞에 늘 좌절했다. 여행이 해내야 할 숙제가 아닌 그저 시간과 공간을 누리는 행복이라는 걸 깨닫게 된 후 <현지인처럼 사는 여행>에 대한 욕심은 한풀 꺾였다. 하지만 여전히 관광객 북적이는 닳고 닳은 여행지 보다, 현지인들의 삶을 엿보는 여행에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 틀에 박힌 여행 말고, 큰돈 들이지 않고도 소소하고 작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사는 여행“의 방법을 공유한다.
요리해보기
주방기기가 구비된 레지던스, 에어비엔비, 호스텔을 묵을 때면 꼭 시도해 본다.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기 전, 마트에 들러 장을 본다. 마치 그 도시에 살며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반조리 식품 즉 RTC(Ready to cook)을 이용하는 것이다. 전 세계 어디나 1인 가구나 맞벌이 부부가 많다. 그러다 보니 전자레인지에 돌리거나 간단한 조리기구만 사용해도 꽤 근사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반조리 식품들이 넘쳐 난다. 대도시일수록 그런 제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어설픈 주방장이 만들어낸 현지 음식을 도전하기 싫을 때 RTC는 평균 이상의 맛을 보장한다. 마트를 둘러보며 장보는 손님들의 손이 가장 많이 닿는 제품을 선택하면 실패할 일이 없다. 스페인의 빠에야가 그랬고, 홍콩의 딤섬이 그랬다. 한국의 이름난 스페인, 홍콩 음식점에서 먹던 것들보다 월등했다. 꼭 반조리 제품이 아니어도 된다. 세계 어디나 있는 식재료로 그리운 한국의 맛을 재현해낼 수 있다. 달걀과 약간의 기름, 채소만 있으면 달걀말이가 탄생한다. 밥을 하면 폴폴 날리는 길쭉한 인디카 쌀 대신, 쌀 모양이 동글동글한 자포니카 쌀을 택하면 한국에서 먹던 찰기가 있는 밥과 얼추 비슷하다. 감자볶음, 채소 부침개 정도는 많은 재료나 복잡한 조리법이 필요하지 않다. 밀가루를 조물조물 반죽해 수제비, 떡볶이도 해먹을 수 있다. 차이니즈 마켓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는 한국 라면은 한식 향수병의 특효약이다. 현지인들의 입맛에 맞춘 현지 한식당에 가는 것보다 가격, 맛 모든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월하다. 그렇게 한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하면 또다시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코인 빨래방에 가기
일주일 이상의 장기 여행에서 빨래는 늘 골칫거리다. 빨래 비누를 챙겨가 손빨래를 하기도 했고, 숙소 프런트에 맡겨 보기도 했다. 하지만 속옷, 양말 같은 작은 빨랫감을 제외하면 좀처럼 손빨래를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① 손빨래가 익숙하지도 않고, ② 손으로 빨기엔 옷의 크기가 꽤 크다. 프런트에 맡긴 옷은 반듯하게 다림질까지 해서 가져 오지만 옷감은 상해 있고, 묘하게 색깔도 바래져 있다. (간혹 분실하는 경우도 있음) 그렇게 회복 불능 상태로 망가져 온 옷들을 몇 번 버리고 나니 아예 프런트에 맡기는 일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대신 프런트에 근처의 코인 세탁소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본다. 하루 일정이 끝나면 모아둔 빨랫감을 싸들고 코인 세탁소에 간다. 빨래를 분류해 빨래를 넣고 세제를 넣고 동전을 넣고 세탁기를 돌린다. 빨래가 다 되길 기다리며 세탁소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거나 지나는 사람을 구경하기도 한다. 방법이 익숙지 않으면 주변의 도움을 청하면 쉽게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안면을 트고, 인사를 하면 짧은 현지어라도 더듬더듬 수다를 떨면 금세 친해진다. 현지인 친구를 만드는 쉬운 방법이다. 아니면 근처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 빨래 종료 시간에 맞춰 복귀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유명한 랜드마크 인증샷 찍기에도 부족한 여행 시간을 빨래를 하고, 장을 보는 평범한 일상으로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특별한 것만을 하는 게 여행은 아니다. 흔한 일상을 낯선 곳에서 해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된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포즈로 인증샷을 찍는 것보다 특별한 경험임은 틀림없다.
목욕탕 가기
목욕탕 문화가 있는 나라가 한정적이기 때문에 경험할 수 있는 곳도 제한적이다. 그런 면에서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일본은 타국의 목욕탕을 쉽게 경험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온천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료칸이나 호텔의 대욕장을 이용할 때 늘 궁금했다. 고급진 이런 목욕탕 말고 작은 동네 목욕탕은 또 어떤 모습일까? 그 궁금증 해결을 위해 얼마 전 홋카이도에 갈 때는 굳이 료칸을 일정에 넣지 않았다. 시내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흔한 주택가 동네의 목욕탕. 노천탕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눈길을 헤치고 도착했다. 우리나라의 찜질방 정도의 크기의 목욕탕. 평일 오후의 목욕탕엔 외국인이라고는 (아마) 나밖에 없었다. 일본 여행이 좋은 이유는 입만 다물고 있으면 크게 외국인 티가 안 난다는 점이다. 거의 혼자 혹은 2명 정도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노천탕으로 향했다. 눈치를 봐가며 주변 사람들이 하는 대로 수건을 곱게 접어 머리에 얹고 노천탕에 앉았다. 마침 눈발이 날렸고 뜨끈한 노천탕에 앉아 내리는 눈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단돈 440엔의 행복. 다음날 바로 귀국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에 그간의 여행을 되짚어 보며 평온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 처럼 때를 미느라 진을 빼지 않고 기분 좋게 에너지를 충전하고 탕을 나왔다. 결론적으로 지금껏 다녔던 료칸이나 호텔 대욕장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다만 동네 사람들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좀 더 회전율이 빨랐다는 점 정도?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리려고 거울 앞에 섰는데 옆에 할머니가 뭐라고 뭐라고 말을 건다. 할머니 앞에는 드라이기가 있었다. 회색과 보라색이 어우러진 그 다이슨 드라이기. 일반 드라이기에 비해 사용 요금이 10배였다. 일 알못(일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인 난 “다이슨”만 알아들었고, 할머니는 “이게 다이슨 맞냐?”라고 물어보는 듯했다. “나는 한국인이라 일본어를 못한다 “고 더듬더듬 일본어로 말하니 할머니는 꽤 놀란 눈치였다. ”이 작은 동네 목욕탕에 외국인이 왜?”라는 의문 가득한 눈빛. 멈칫하는 것도 잠시, 처음 보는 할머니는 끊임없이 일본어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난 옅은 미소와 짧은 일본어로 대화를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할머니께 간단하게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는 세상 인자한 미소로 남은 여행 잘 하라고, 또 삿포로에 오라고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관광객이 많은 곳에 가면 더듬더듬 한국어로 말하는 상인이나 점원들을 만나게 된다. 반면 현지인들이 사는 곳에 가면 현지어로 더듬더듬 말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광객을 대하는 관광지의 의무적인 친절함 말고, 평범한 사람들의 대가 없는 친절함을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관광객을 위해 꾸민 세련된 친절함 대신 투박하지만 꾸미지 않은 현지인의 민낯을 만나게 된다. 그래서 사는 여행이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