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금메달리스트 오상욱 선수 인터뷰가 남긴 것들
올림픽이 끝나면 방송, 신문, 잡지에서는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선수들의 이야기가 콸콸 쏟아진다. 평생 땀 흘리며 달려온 끝에 인생의 훈장 같은 올림픽 메달을 딴 선수들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때면 숙연해진다. 어느 한 사람 순탄하게 승승장구하며 메달을 목에 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중 2024 파리 올림픽에서 한국의 첫 금메달 주인공, 펜싱 오상욱 선수 인터뷰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출처 : tvN 유 퀴즈 온 더 블럭
이견이 없는 압도적인 실력, 모델 못지않은 훤칠한 외모, 신사적인 매너, 매끈한 입담, 수려한 노래 실력까지... 오상욱 선수는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육각형 인간다운 면모를 보여줬다. 감탄하며 인터뷰를 보는데 의외의 사실을 알게 된 후 놀랐다. 지금은 무려 키 192cm라는 펜싱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데,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160㎝ 정도로 또래 선수들보다 한참 작은 키였다. 당시 친구들은 키가 178-180㎝인데 본인은 160㎝라 경기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키 큰 선수들과 경쟁하기 위해서 키가 작은 선수들이 하는 스탭을 익히는 방법밖에 없었다. 체격적으로 팔다리가 긴 사람이 유리한 펜싱. 그 세계에서 작은 키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익힌 스탭은 의외의 반전을 몰고 왔다. 뒤늦게 키가 192cm까지 크면서 펜싱에 적합한 피지컬을 갖추게 됐고, 작은 사람들이 쓰는 스탭까지 가능한 ‘펜싱 몬스터‘가 된 거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시간을 되돌려 160cm의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오상욱 선수의 상황에 놓인 나를 상상해 봤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 피지컬은 선수 생명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다. 나보다 머리가 하나 더 있는 팔다리 긴 선수와 경기를 해봤자 피지컬에서 밀려 패배가 익숙했다면? 자라지 않는 키를 원망하며 펜싱 선수의 길을 일찌감치 접었을 거다. 이길 승산이 없는 경기를 해봤자 시간만 허비하는 거니까. 그 피지컬로는 올림픽 금메달은커녕 선수 생활을 이어갈 재능이 없다고 단념했을 거다.
최고의 재능은 역시 ‘꾸준함‘이었다. 장차 그랜드 슬램을 달성할 펜싱 꿈나무의 멘털은 근성 없는 일개 프로 단념러와는 차원이 달랐다. 펜싱 선수가 가져야 할 피지컬을 가지지 못한 현실을 원망하며 포기하는 대신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무기를 찾고 꾸준히 단련했다. 실력과 멘털을 단단히 다잡았다.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뒤늦게 성장판 신의 가호를 받아 괴물 피지컬까지 갖추게 됐다. 세계를 제패한 금메달 2관왕의 주역이자 대한민국 펜싱 선수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이라는 꽉 닫힌 해피엔딩은 어쩌면 꾸준히 노력한 자에게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절망과 포기가 흔한 시대라서일까? 어떤 색이든 메달을 쥐고 환하게 웃는 선수들의 얼굴을 볼 때면 코끝이 시큰해진다. 실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대신 어떻게든 탈출할 방법을 찾아 원하는 결과를 얻고야 만 선수들의 노력을 상상하면 뭉클하다. 예고도 없이 문을 컥 여는 불청객처럼 불안이 내 인생에 발을 들이밀 때마다 메달을 걸고 환하게 웃는 선수들을 떠올린다. 다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치밀어 오르더라도 일단 꾹 참는다. 그리고 일단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다 보면 혹시 모를 일이다. 꽉 닫힌 해피엔딩으로 나를 데려다 줄 유일한 티켓은 ’꾸준함’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