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피자 기피자'의 피자 항복기
피자 하나 먹겠다고 부산에 가는 사람이 있을까? 놀랍게도 그런 사람이 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나다. 경기도 북쪽에 사는 사람에게 부산이라는 땅은 제주도와 동급이다. 비행기를 타고 가냐, 기차를 타고 가냐의 차이일 뿐 한반도의 끝이나 마찬가지니까. 심리적, 물리적 거리가 있어서 감히 갈 생각을 못했다.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경기도 촌년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 처음 간 지방 출장지가 바로 부산이었다. 부산 영화제 취재차 팀원들과 함께 승합차를 타고 밤새 달려 부산에 갔다.
부산에 온 첫날, 부산까지 왔는데 ’돼지국밥‘은 먹어 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선배들이 끌고 간 서면 시장의 허름한 국밥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코를 찌르는 쿰쿰한 돼지 냄새에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며 조용히 숨을 참았다. 돼지... 국밥이라니... 이름에서부터 거부감이 들었던 그 음식이 부산의 첫인상이었다. 새초롬한 경기도 촌년은 이름과 냄새에 지레 겁부터 먹었다. 돼지국밥은 뜨는 듯 마는 듯 시늉만 했고, 맨밥에 깍두기만 먹었다. 식당을 빠져나와서도 한동안 냄새가 몸에서 가시지 않던 돼지국밥은 한동안 부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단어였다. 어수룩한 초보 티를 벗고 ’그 바닥‘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사이 출장과 여행으로 몇 번 더 부산에 갔다. 돼지국밥은 다음번 출장에 마스터했고, 밀면, 유부 주머니 등 차례로 부산 음식을 정복했다.
올해도 생일 주간을 맞아 여행 계획을 세우던 중이었다. 어디를 갈까? 머리를 굴리는데 알고리즘이 포스팅 하나를 대령했다. ’부산의 자부심, 이재모 피자‘ 익히 들었던 이름이다. 발에 차이는 게 피자집인데 뭐가 다른 걸까? 호기심이 발동해 클릭한 이후 내 피드는 이재모 피자로 도배됐다. <대체 이재모 피자가 뭔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건 부산에 가라는 여행 신의 계시다.’ 라고 느낀 순간 바로 KTX와 숙소를 예약했다. 그리고 며칠 후 부산에 도착했다.
오픈런이 아니면 2~3시간 대기는 필수라는 이재모 피자. 내 작고 귀여운 체력으로 그런 대기를 시도하긴 무리였다. 극강의 계획형 인간은 이재모 피자를 최고의 상태로 영접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단계는 배달이 가능한 ‘이재모세권’에 숙소 잡기. 2단계는 25km 달리기.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묻는다면 내 답은 하나다. 그저 이재모 피자를 맛있게 먹고 싶을 뿐. 다대포 해수욕장에서 시작해 낙동강을 따라 왕복 25km를 달렸다. 시원한 바닷바람에 답답한 속도 풀어내고, 쉬엄쉬엄 철새도 구경하고, 눈부신 윤슬도 즐기면서 뱃속을 최적화시켰다. 3단계는 머릿속이 ‘이재모 피자’로 가득 찬 상태로 땀에 절어 숙소로 돌아오는 길, 빠르게 배달 앱으로 미리 주문 넣기. 평소 배달 주문을 즐겨하는 편이 아니라 앱까지 새로 깔아야 했다. 극한의 현장 대기를 견딜 체력은 없지만 집념은 넘치는 중년이므로 과감히 주문했다. 배달 주문이야말로 이번 여행 최고의 현명한 선택이었다.
전날 저녁 6시 이후로 먹은 게 없으니 거의 20시간 넘게 공복 상태라 발걸음이 빨라졌다. 빛의 속도로 샤워하고 머리를 말리는 사이 띵동! 알람이 울렸다. 배달이 도착했다는 소식이다. 머리를 말리다 말고 문을 열어 따끈따끈한 피자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미리 준비해 둔 테이블에 피자를 펼쳤다. 내 기대가 컸을까? 겉보기에는 기존 피자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여 약간 실망했다. 그래도 맛을 보면 좀 다르지 않을까? 기대를 안고 피자 한쪽을 집어 들었다.
흘러넘치는 치즈를 단속하면서 크게 한입 메어 문 순간 동공이 커지는 게 느껴졌다. 어? 이게 뭐지? 매장에서 먹는 것만큼 뜨거운 온도에 일단 놀랐다. 그리고 밀가루 냄새 하나 없이 쫄깃한 도우가 씹혔다. 이어서 생토마토를 바로 갈아 졸인 듯 산뜻한 소스 풍미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오레가노, 바질 같은 허브 향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치즈. 갓 짜낸 우유를 뭉쳐 놓은 듯 부드러운 향과 탄력감 넘치는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미국식 피자 같은 풍성한 토핑이 있었지만 정작 맛은 이탈리아식 화덕 피자의 신선함을 품고 있었다. 샐러드가 피자로 태어나면 이런 맛이지 않을까? 싶을 만큼 싱그러운 맛이었다.
평소 배달 피자를 먹을 때마다 레고 블록이 떠올랐다. 포장을 벗긴 공장제 도우 위에 깡통에 든 피자 소스를 발라 합성 치즈를 얹어 매장에서 구워내는 모습. 이 과정이 마치 레고 블록을 조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누가 사주는 게 아닌 이상 언젠가부터 내 돈 주고 배달 피자를 먹지 않게 됐다. 그런 조립형(?) 피자에 익숙한 입에 이재모 피자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피자를 먹으러 굳이 부산까지?라고 생각하던 시절을 반성한다. 피자를 먹으러 부산까지 갈 이유가 충분했다.
이재모 피자가 안겨준 기분 좋은 충격을 안고 여행을 마쳤다. 체크아웃을 하고 숙소 후문으로 나왔다. 분리수거장 폐지 모아둔 곳에 눈에 익은 빨간색 이재모 피자 박스 산이 보였다. 이재모 피자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 이 호텔에도 많았나 보다. 서울행 KTX를 기다리며 부산역에 앉아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 손에는 어김없이 빨간색 이재모 피자 박스를 쥐고 있다. 마치 대전역에 오가는 사람들 손마다 성심당 빵 봉투를 쥐고 있는 것처럼. 피자 박스를 쥐고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설렘과 즐거움이 묻어났다. 집으로 돌아가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재모 피자의 맛을 나눌 수 있다는 기쁨 때문이 아닐까?
내게 영화의 도시, 커피의 도시, 돼지국밥의 도시였던 부산. 이번 여행으로 부산은 이재모 피자의 도시로 업데이트됐다. 별로 좋아하지 않던 피자를 다시 보게 만든 ‘이재모 피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온몸으로 느낀 여행이었다. 매력적인 콘텐츠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단숨에 끌어모으는지 살갗으로 체감했다. 1992년 창업했으니 내가 처음 부산에 갔을 때도 분명 존재했던 이재모 피자. 현지인들 사이에서 꾸준히 사랑받던 그곳이 이제 부산에 오면 꼭 들려야 할 전국구 맛집이 됐다. 반짝 인기로 스타가 된 게 아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탄탄한 실력을 갖추고 있으면 언젠가는 꼭 빛을 본다는 진리를 피자 한 판에 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