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키우다 나를 잡아먹는 억울함에 대하여
80년대 중후반, 야생의 시대에 자립 생존은 일상이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언니들을 등교시키고 나면 엄마는 고물고물한 꼬맹이 둘을 떼어 놓고 장사하러 가야 했다. 집에 남은 나와 동생에게 엄마는 지루함을 달랠 용돈을 줬다. 6살인 나에게는 300원, 3살인 동생에게는 500원. 지금처럼 보육 시설이 잘 되어 있지도 않았던 시절, 유치원도 가지 않았던 나는 엄마를 기다리며 그 돈을 슈퍼에 가서 과자나 사탕을 사는 데 그날 받은 용돈을 모두 탕진했다. 군것질할 생각에 빠져 받을 때는 별말이 없이 넙죽 받아 놓고 나중에 머리가 커서 생각하니 뒤늦게 궁금했다. 그 금액 차이는 뭘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엄마에게 물었다. 동생은 숫자도 잘 모르고 돈은 머리 큰 내가 필요해도 더 필요한데 왜 동생에게 더 많이 줬냐고. 아들이라서 더 준 거냐고. 무슨 숨은 의도가 있는 거였냐고. 숫자도 모르는 동생 손에 쥐어진 500원의 기억을 떠올리니 심술이 났다.
돈을 준 엄마도, 받은 동생도 금시초문인 표정에 당황했다. 두 사람의 기억 속에는 까맣게 지워진 추억이었다. 한 많은 셋째 딸만 기억하는 지난날이라니... 순간 서글펐지만 그 속상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 남매 틈바구니에서 생존하기 위해 6년간 단련해 온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었으니까. 순둥이 동생에게 동전 세 개가 더 많으니 동전 하나와 바꾸자고 꼬셔 기어코 500원짜리 과자를 사 먹은 영악한 누나였으니 크게 손해 본 것도 아니다.
이렇게 똑같은 상황도 사람은 다 자기 입장에서만 기억한다. 대체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억울하고, 손해 본 기억만 깊게 남는다. 심장이 약해 먹게 된 한약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는 나를 위해 소고기를 넣은 만두를 따로 만들어 준 엄마의 정성은 쉽게 잊는다. 없는 살림에 대학 등록금 밀리지 않고 학교 다닐 수 있게 해 준 부모님의 노력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컴퓨터 학원 안 보내줬다고 이불 뒤집어쓰고 울던 내 분노는 정당했고, 아무리 허리를 졸라도 학원비 나올 구멍이 없었던 그 시절 부모님의 지갑 사정은 원통했다. 성질부리는 사춘기 딸 마음 좀 풀어 보겠다고 쾅 닫힌 문을 두드려 붕어빵 봉지를 밀어 넣던 엄마의 조심스러운 손을 귀찮게 여겼다. (하... 쓰고 보니 나 찐 쓰레기였네...) 그 시절 부모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빈궁한 시절 남에게 손 벌리지 않고 아이 넷을 키우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게 됐다.
돌아보니 나는 피해의식을 유난히 오래 붙잡고 사는 사람이었다. 슬프게도 아직 그 버릇은 말끔히 고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내 입장에서 사건을 해석하고 그중에서도 손해 봤다고 믿는 오류를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3살 어린 동생이 500원을 받을 때, 300원을 받은 기억을 붙잡고 있는데 동생은 그런 일이 있었냐고 고개를 갸웃하는 것처럼. 같은 날, 같은 공간에서 그것도 반복적으로 벌어진 일인데도 각자 다른 기억이 있다. 그런 기억은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동생과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도 그 억울한 기억은 털어 버리기로 결심했다.
생각해 보면 ’기억‘이라는 건 사건을 뇌에 저장하는 장치라기보다 감정을 덧붙여 재구성하는 과정에 더 가깝다. 그래서 어떤 장면은 과장되고 어떤 장면은 새까맣게 지워진다.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억울하다고 믿었던 기억들 사이, 사실은 고맙고 따뜻했던 순간들이 훨씬 더 많이 섞여 있었다는 걸. 다 지나간 일에 대해 자기 연민에 빠져 끙끙거리며 앓아 봤자 나만 곪는다. 어차피 지나간 일이라면 편향된 서러움은 버려야 한다. 대신 고맙고 따뜻했던 기억부터 챙겨서 안고 가는 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보탬이 된다. 혼자 키워 온 오해의 흔적들은 결국 나를 잡아먹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