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무기력 상비약

일단, 삶은 달걀부터 까고 시작할게요

by 호사


“일단, 삶은 달걀 까먹으면서 생각해 볼까?”

냉장고에는 항상 나만의 무기력 상비약이 있다.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단백질 보충을 위해 먹던 단백질 강화 두유에 삶은 달걀 2개를 더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늘 냉장고에는 미리 삶아둔 한 판 분량의 달걀이 쌓여 있다. 보통은 달리기 후 집에 와서 씻기 전 빠른 단백질 보충을 위해 먹는 게 일상이지만 종종 무기력 비상약으로 쓴다.

배고플 때, 헛헛할 때, 요가나 달리러 나가기 싫을 때, 생각이 뒤엉킬 때, 해야 할 일이 줄을 섰을 때, , 무기력할 때처럼 싫은 감정이 머릿속을 채우면 삶은 달걀을 꺼내는 습관이 생겼다. 차가운 삶은 달걀을 단단한 바닥에 탁 쳐서 금을 내고, 껍질을 벗긴다. 나중에 먹을 때 입안에 남는 하얀 난각막까지 깨끗하게 제거하면 완성. 내 마음의 찝찝한 미련까지 함께 벗겨내는 기분이다. 한입 베어 물고 오물오물 씹다 보면 서서히 목이 막힌다. 그때 단백질 두유를 마시면 깔끔하게 문제가 해결된다. 무념무상으로 달걀 두 개를 먹고 나면 신기하게 하기 싫었던 마음에도 조금씩 균열이 생긴다. 톡 쳐서 껍질에 금이 간 삶은 달걀처럼.

삶은 달걀의 효과일까? 삶은 달걀 안의 좋은 성분이 몸 안에 퍼져 기운이 나게 하는 건지, 아니면 달걀을 깨는 물리적 행동이 심리적으로 변화를 만드는 건지 ’ 뼛속까지 문과‘인 내 머리로는 알 수 없다. 원리는 모르지만, 효과는 확실하다. 삶은 달걀 2개일 뿐인데 그걸 먹고 나면 새로운 뭔가를 할 힘이 생긴다.

낯선 사람이나 새로운 걸 맞닥뜨리면 뇌에 정지 버튼이 눌리는 사람은 방구석 수호자가 될 수밖에 없다. 예측과 통제가 가능한 나만의 작은 왕국 = 내 방 안에서 머릿속으로는 뭐든 가능하다. ’내가 하면 또 잘하는데 시작을 안 해서 그렇지’라는 정신 승리마저도 가능했다. 시작이 어려운 사람은 크고 대단한 결과를 머릿속에 그리는 게 취미다. 그러니 시작도 하기 전에 지쳐 포기부터 한다. 노력은 귀찮고, 성과를 얻는다는 보장은 희박하니까. 그렇게 나는 시작보다 생각만 하는 사람이었다. 크고 탐스러운 열매를 갖고 싶다는 욕심은 큰데 슬프게도 무기력이 발목을 잡았다. 열매를 얻으려면 밭도 갈고, 씨도 뿌리고, 물도 주고, 잡초도 뽑고, 벌레도 잡는 그 지루한 과정을 머릿속에 시뮬레이션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졌다.

종종 생각한다. 20~30대 시절, 이 ‘삶은 달걀의 마법‘을 알았다면 내 인생은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삶은 달걀 껍질 깨기처럼 사소한 행동으로 무기력을 털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 진리를 평생 모른 채 꼬장꼬장한 방구석 호랭이로 살다가 죽는 것보다 중년인 지금이라도 안게 얼마나 다행인가?

그래서 하기 싫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전에 일단 냉장고로 향한다. 그곳에서 평화롭게 잠든 삶은 달걀 2개를 꺼낸다. 당장 대단한 사람이 될 순 없지만 달걀 껍데기를 까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조리대 바닥에 톡 하고 쳐서 껍질에 금을 낸다. 그 금 부분에 손가락에 힘을 줘 틈을 만들고 조심조심 껍질을 벗긴다. 매끈 탱탱한 하얀 달걀을 한입과 함께 가출했던 의욕도 함께 목구멍으로 밀어 넣는다. 그렇게 달걀 껍데기에 금을 내는 순간, 내 무기력한 마음에도 금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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