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사 May 28. 2018

여행에서 아무것도 안 할 자유

 도시 속 자발적 고립을 위해 도착한 그 곳, 오사카 나카노시마

    


나카노시마(中之島)에 처음 간 건 4년 전 가을이다. 여러 번 오사카에 갔었지만 나카노시마만큼은 처음이었다. 간사이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교토로 이동해 5일간 묵고 6일째 되던 날 오사카로 숙소를 옮겼다. 숙소를 옮긴 날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쳐 빡빡하게 일정을 잡지 않는다. 게다가 그날은 주말이어서 어딜 가든 사람이 많을 것 같았다. 인파를 피하고 싶었다. 느긋하게 쉬다가 늦은 오후에는 오사카 시내에서 야경이 예쁘다는 나카노시마 강변에 가기로 했다. 맛있는 커피를 파는 분위기 좋은 리버뷰 카페도 있다 길래 잔뜩 설레 요도야바시역에 내렸다. 막상 역 밖으로 나가니 우뚝 솟은 회색 빌딩 숲뿐이었다. 우메다 같은 세련된 빌딩 숲은 아니고 연식이 느껴지는 고층 건물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었다. 마치 여의도 빌딩 숲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가 기껏 빌딩숲 보려고 여기까지 왔나 싶어 잠시 실망이 몰려올 찰나!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강이 보인다. 가슴이 뻥 뚫린다. 머리 위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육교나 전철도 없다. 우메다, 도톤보리, 난바의 북적임은 1g도 없다.         




나카노시마(中之島)

오사카시 중심부 도지마(堂島) 강과 토사보리(土佐堀)강 사이의 좁고 긴 섬으로

여의도의 면적의 약 4분의 1이다.

시청사・국제회의장・미술관과 과학관・아파트・공원 등이 있으며 섬 주변에 금융・오피스가 밀집됐다.      

                                                                                                

                                                                                            - 일본 정부 관광국 -    



잔잔하게 흐르는 물은 묘하게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홀린다. 마법을 부린 듯 그저 보고만 있어도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마음은 평화로워진다. 함께 온 여행 메이트와 함께 여백 많은 시덥잖은 수다를 떨며 강변을 걸었다. 지금도 그때를 회상하면 별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데도 마냥 웃음이 났고 행복했다고 우리 두 사람은 회고한다.     


두 여행자의 목표는 역에서 도보 10분 거리의 나카노시마 공원이었다. 이곳은 오사카에서 제일 먼저 생긴 공원이라고 한다. 특히 매년 5~6월이 되면 세상의 모든 장미를 모아 놓은 듯 장미가 가득한 장미원이 있는 곳이다. 하지만 내가 갔을 때는 한창 가을이었기 때문에 철 모르고 피어난 시들시들한 장미 몇 송이만 남아 있었다. 싱그러운 장미는 없었지만 주말 오후여서 그런지 가족, 친구, 연인과 도심 속 여유를 즐기는 오사카 사람들이 가득했다. 또한 코스프레 동호회에서 왔는지 아름다운 메이드 복을 입은 남녀노소가 사진 찍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을 뒤로하고 당시 핫했던 카페 <모토 커피>를 찾았지만 이미 만석이었다. 발걸음을 돌려 근처에서 대안으로 찾은 (지금은 모토 커피보다 더 핫해진) <브루클린 로스팅 컴퍼니>란 이름의 카페에 들어가 라떼 한잔을 시키고 강변에 자리를 잡았다. 라떼는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고 뜨겁게 쏟아지던 가을 햇살은 한풀 꺾였다. 기력을 잃은 해는 서둘러 슬슬 빌딩 숲 사이로 사라지며 내일을 기약했다. 기분 좋은 강바람은 커피 향을 머금고 내 볼을 스쳐 갔고, 하나 둘 켜지는 강변의 가로등 불빛들은 귀한 보석처럼 반짝였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그때 생각했다. 다음에는 이렇게 스치듯 지나칠게 아니라 아예 나카노지마에 묵어야겠다고.     




그 다짐은 2년 후 현실이 되었다. 혼자 떠난 여행이었기에 내 마음대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일정도, 숙소도, 먹을 것도 내키는 대로 했다. 오사카의 숙소를 골라야 할 때, 긴 고민을 하지 않고 나카노시마의 한 호텔을 예약했다. 토사보리강이 보이는 리버뷰의 고층 호텔을 골랐다. 신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하고 조용했다. 어딜 가든 존재감을 뽐내던 중국인 관광객들도 없었다. 내가 묵은 호텔은 우메다역 옆 JR 오사카역에서 호텔 셔틀을 타고 10분쯤 들어가야 한다. 일정이 빡빡한 관광객에게는 단점일 수 있겠지만, 나처럼 작정하고 틀어박혀 휴식을 취하고 싶은 여행객에게는 그것이 장점이 되었다.


    


3박 4일. 나카노시마에 묵을 때 난 참 단순하지만 호사로운 날들을 보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잤다. 집을 떠나 여행이란 이름으로 머물지만 기억하기 위해, 기록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메이드에게 청소할 시간을 주기 위해 정오 무렵 셔틀버스를 타고 나가 우메다로 나가서 가서 점심을 먹었다. 소화시키기 위해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한 바퀴 돌고 걸어서 나카노시마 강변으로 돌아온다. 강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해가 지는 멍하니 좀 바라보다 보면, 어느새 퇴근 시간이다. 전철역으로 향하는 퇴근족과 역방향으로 나카노시마 강변 산책을 한다. 한 1~2시간 정도 걷다 보면 퇴근족들은 사라지고 강 건너 주택가의 마트에 가서 마감 세일하는 즉석식품과 맥주를 사서 호텔로 돌아온다. 그리고 뭔 뜻인지도 모르지만 자막과 과장된 리액션으로 도배된 일본 뉴스와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저녁 겸 야식을 먹는다. 몇 시가 되었건 맥주도 먹을거리도 바닥이 보이면 정리를 하고 씻을 준비를 한다. 미리 사둔 입욕제를 풀고 욕조에 들어간다. 몸도 마음도 노곤해지면 다시 잠자리에 든다.     


다시 나카노시마에 돌아오기까지 2년간 나에게는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인생이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혔고 과도한 고민과 걱정은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한다는 걸 보고 느끼고 깨달았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안절부절못할 필요도 없고, 가진 것에 대해 우쭐할 필요도 없었다.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비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무사히 2년을 버텨온 나를 위해 내가 준비한 선물이 바로 나카노시마에서의 3박 4일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처음으로 만끽한 여행이었다. 너무 낯설지도 너무 익숙하지도 않은 공간과 시간이 필요했던 나에게 이보다 완벽한 공간은 없었다. 물론 돈과 시간을 투자해야 했지만 그 이상의 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유독 지치고 힘이 없을 때, 나카노시마에서 호사를 부렸던 날들이 떠오른다. 느긋했고,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했고, 무언가를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가 생긴 느낌이다. (물론 비행기표와 일정 자금이 필요하지만) 내게 그런 곳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언제든 지금 있는 이곳으로부터 도망쳐 몸도 마음도 숨을 곳이 필요할 때, 나는 다시 나카노시마로 향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 세상에 망한 여행은 없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