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언저리의 디딤돌

문화공간 산책 3 - 제주 북갤러리 파파사이트

by 행복한독서

파파사이트는 제주 서쪽의 작은 마을에 있는 작은 문화공간입니다. 제주로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했느냐, 파파사이트는 어떻게 하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2014년 서울을 떠난 때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서울에서 오래된 단독주택을 구하여 전시디자인 스튜디오를 마련한 때의 열정은, 십여 년간 갑의 규정과 취향에 맞추어 전시를 만들고, 전시가 끝나면 유물 외의 모든 것을 폐기하여 빈 공간으로 되돌려 놓는 을의 작업을 하면서 전시의 가치에 대한 회의로 변색되었습니다. 짧게는 유통기한이 20일, 길게는 일 년 가까이 유효한 전시 공간을 만들고 지우는 일을 정리하고 제주로 향한 그때에는 새로운 일을 찾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21년 5월, 구글맵에서 파파사이트를 검색하면 ‘저지리’라는 마을의 언저리에 위치한 한 점으로 나타납니다. 50대 중반의 전시디자이너와 기획자 부부는 그 점에서 여전히 전시와 관련된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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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종이의 원료로 쓰이는 닥나무 ‘저(楮)’의 한자음을 빌려 지어진 마을과의 인연에 경도하여 절판도서를 모아 종이책의 시공간을 연출했습니다. 그런데 파파사이트가 책을 살 수 있는 서점인지, 책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북카페인지, 아니면 책을 관람하는 갤러리인지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반응에 주춤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공간의 구석에서 언제까지 헛발질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즈음 이웃으로 인사하는 사이인 김연수 작가의 첫 만화책 『알자스의 맛』이 곧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 되겠다고 작정하고, 20년이 지나서야 자신의 첫 만화책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의 조용하면서도 끈질긴 작업을 전시의 언어로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다는 마음을 좇아 오랜만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제주 입도 3년이 채워지는 2017년 10월, 7주 동안 이웃들이 일부러 찾아온 그 가을의 전시는 파파사이트가 마을의 한 공간으로서 지향점을 자각하고, 전시디자이너와 기획자의 본캐가 부활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습니다.


2018년 겨울, 섬세한 노동의 지구력으로 유지되는 서비스 공간과 집요한 질문의 집중력으로 순환하는 문화공간 중 하나만 취해야 하는 순간에 일 년 동안 외부에 대관하는 선택을 했습니다. 또 공백의 1년을 보내는 내내 자본주의 시스템에 길들어진 삶과 파파사이트를 마주하고, 부끄러운 시행착오로 얼룩진 시간을 삭제하여 원점으로 돌아가는 대신 멈추었던 지점에서 선을 잇기 위해 2020년을 준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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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문화예술지원사업 공모를 검색했습니다. 파파사이트에서 음식 메뉴들을 도려내고 마을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에게 만남을 청하여 서로의 관심사를 이야기했습니다. 수입을 늘리지 않는 만큼 지출을 줄이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하지만, 사람과 공간을 꾸미기 위한 소비를 하지 말자 결심했습니다.

영화를 통해 동시대의 세계를 만나는 리민극장(里民劇場)을 기획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바이러스의 침입으로 모든 계획은 일단 정지의 경고 사인 앞에서 멈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반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든 공공문화예술기관의 공연장과 전시장이 출입구를 봉쇄하고 온라인 세계로 몰려가는 바람에 황량해진 오프라인의 평행 세계에서 파파사이트는 제주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현재 진행 중인 작품과 주제를 소개하는 전시를 열고, 제주의 근현대사와 민간신앙을 조명한 강좌를 운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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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과 기후위기로 일상이 파괴되고 어디로도 갈 수 없으나 어디라도 가야 하는 난민들을 잊지 않기 위해 7개월 동안 뜨개질 공동체 프로젝트를 진행했습니다. 출판사와 연계하여 작가들의 강연을 기획하고, 리민극장을 통해 제주 영화관에서 보기 쉽지 않은 다섯 편의 영화를 만났습니다. 토요일 오전에는 그래픽노블을 함께 읽고 서평 쓰는 소모임을 꾸렸습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계는 변방에 있는 작은 문화공간이 네트워크를 개척하여 일하는 방법을 습득하고 생존하는 힘을 키우게 한 광장이었습니다.


작은 마을의 작은 민간 문화예술공간을 지키는 일은 운영을 책임진 개인과 공간이 서로의 독립을 존중하면서 동고동락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간을 운영하면서 부닥치는 어려움은 일상의 평안을 뒤흔드는 두려움으로 몸집을 키워 운영자를 무력하게 만들고, 상식의 탈을 쓰고서 친밀하게 다가와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 조곤조곤 설득하기도 하고,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일을 벌이는 쓸모없음과 미련함과 무능함을 조롱합니다. 그러나 파파사이트는 유통기한이 다할 때까지, 지도상의 점에서 마을의 돌이 될 때까지, 지금 여기의 점에서 어디로 선을 이어야 할지 질문하는 2021년을 살려고 합니다. 전국 곳곳의 마을에서 이웃과 함께하는 문화공간을 준비하고 운영하는 분들의 모험하는 인생을 응원합니다.


위치 : 제주시 한림읍 용금로 889(저지문화예술인마을)

운영 시간 : 전시 기간 동안 오전 11시~오후 6시 / 일, 월요일 휴관

연락처 : joymoksori@gmail.com•인스타그램 : @papasitejeju


홍영주_북갤러리 파파사이트 운영자


이 콘텐츠는 <동네책방동네도서관> 2021년 5월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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