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맺음의 허구

by 정오의 햇빛

매주 목요일이면 영화를 보러 간다. 환경도 좋고 영화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비용도 들지 않는다.

영화는 있지만 관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각자 자기 영화를 보고 영화를 마음에 품고 돌아간다.

그리고 일주일 후 다시 또 영화를 보러 오지만 서로에게 건너가는 움직임은 없고 각자는 어둠 속에서 각자의 내부에서만 영화를 본 채 돌아간다. 영화는 이미 단순한 콘텐츠가 아니라 관계를 대신해 축적되는 안전한

대상같이 느껴진다. 집에서도 혼자 볼 수 있는 영화를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관계있음이다.

맺음과 있음은 다른 차원이다.

관계는 늘 불확실하고 상처를 낼 수도 있고 내가 내민 손이 허공을 가를 수도 있는데 영화는 배신하지 않는다.

준비되지 않은 나를 검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왠지 영화만을 보기 위해서 가는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모임을 통해 누군가와 만나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오지만 만남은 일어나지 않고 영화만 차곡차곡 통장에 잔고로 쌓여만 간다.


잔고가 쌓여갈수록 기뻤던 날들도 있었다.

그때는 통장의 잔고가 내 삶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주변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잔고에만 온 관심이 쏠렸던 시절.

쌓여가는 잔고는 관계하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성취였다.

지금은 잔고가 삶의 의미는 아닌데 여전히 잔고만 쌓여가고 공허도 함께 쌓여간다.

욕망의 방향은 바뀌었는데 몸의 습관은 여전하다.

아무도 관계의 첫 문장을 열지 않는다.


어쩌면 모두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만나고 싶다.

그러나 먼저 말을 걸 만큼 확신은 없다.

그래서 모두가 안전한 침묵 속에서 영화를 본다.

아무도 만나지 않은 채 헤어지는 정제된 고독이 반복된다.


그런데 말입니다.

정말 관계를 맺고 싶은 걸까? 늦은 시간 끝나기에 후속모임을 할 여지도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 같이 관계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다.

한 번의 눈빛과 한 마디의 말이 전체를 대변한다.

그래서 묻게 된다.

관계의 무게를 과대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관계가 너무 의미를 띠게 되어버린 상태일까?

어쩌면 영화모임은 관계를 만들기 위한 장소라기보다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각자의 내부를 존중받는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시작도 실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

관계를 만들지 않기로 암묵적으로 합의된 공간인 것 같기도 하다.


관계에 대한 기대 없이 영화만 봐도 충분하기는 하다.

영화 보는 시간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고 한 번의 눈빛으로 나를 발가벗기지 않는

무관계의 친밀함이기도 하다.

같은 것을 보되 서로를 소유하지 않는 상태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 없이 관계하는 것은 많다. 무수히 많은 대상이 있지만 시선을 가진 존재는

인간뿐이다. 관계는 의미의 교환만이 아니라 현존의 교환이다.

관계란 말을 주고받는 것뿐이 아니라 시선을 주고받고 손을 마주쳐 온기를 나누는 것일 수도 있고

더 멀리 나아가면 몸 전체로 부딪히는 경험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과 관계할 때 지금 여기 있을 수 있고 의미가 아니라 온도를 나눌 수 있고 이해가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저항과 반응의 역동을 경험할 수 있다.

관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결국 몸의 관계에 닿는다.

몸전체의 만남은 섹스라는 행위라기보다 말로 조절할 수 없고 시선만으로도 부족하고 전부를 걸어야

가능한 가장 극단적인 현존의 방식이다.


하지만 말입니다.

누구와 섹스할 수 있겠는가? 말의 문턱에서 넘어지고 시선을 주고받는 순간 전 인생동안 축적된

데이터가 실시간 전송되고 판단된다. 무언의 검증은 끝나고 이미 닿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한다.

나이 들어서의 섹스는 그 모든 관문을 통과해야 가능할 테니 몸의 만남은 가능하지 않다.

젊어서는 오직 몸만으로도 섹스할 수 있고 감각의 교환만으로도 섹스가 가능한 시절이다.

말이 부족해도 세계관이 달라도 삶의 데이터가 정렬되지 않아도 감각이 먼저 하고 의미는 따라온다.

감각이 통화였던 젊은 시절.

예술가들은 그들의 감각을 표현해 자아를 실현한다. 감각이 가장 잘 통하는 언어이자 기준이었던

시절. 그것이 젊음이다.

그렇다면 관계가 일어나기 힘든 이유는 주고받을 감각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자기의 느낌을 말로도 전할 수 없고 자기 안의 감각을 전할 수도 없고 상대가 주는 감각도 받을 수가 없고

자기의 감각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육체적인 감각인들 온전하겠는가?

느끼기보다는 해석하고 닿기보다는 계산한다. 몸은 살아있지만 감각은 말라 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혼자서라도 더듬어 보는 시간은 참 행복하다. 타인과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하는

시간. 글쓰기가 무엇인지 이제 좀 알 것 같다. 마음이 분주해서 목적지도 없이 달리고 있었다.

그저 움직이는 중이고 무엇으로라도 결과를 만들어내서 나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압박에 떠밀려 다녔다.

그 시간 속에서는 글을 쓰며 자신을 만나고 느끼는 그 결과물은 책. 완성도. 성취. 타인의 반응들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만족을 위한 글쓰기는 시간낭비이고 물질 낭비이고 가치 없는 내 글을 읽을 타인의 시간을 뺏는 행위라 여겼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은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고 일생을 달려왔지만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나를 잘 느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고 그런 나를 비난 없이 수용할 수 있는 상태였다.

나를 재촉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고 판단 없이 나를 듣는 글쓰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말을 글로 옮기는 일이다.

이제야 하는 이 말은 마치 지금 이전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남기는 유언과도 같다. 너는 이제 이렇게 살아라

나는 그만 간다. 존재방식의 변화 앞에 놓여있다.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나에게 먼저 할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누군가와도 나눌 수 있게 된다.


관계가 일어나기를 기대했던 그 마음은 나를 보는 외부의 시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외부의 시선을 통해 나를 보고 나를 느끼는 상대를 통해서 나를 느끼는 것 그것은 애기가 하는 애착반응이다.

생애초기에 맺는 관계 맺기 방식이다. 그 관계를 통해 애기는 자신을 인식하고 자신을 객체화시켜 주체로 살아가게 된다. 주어진 시선의 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면 평생 시선을 갈구하게 되는데 사랑을 원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감각하기 위해서이다. 관심종자들이 시선에 노출되기를 바라는 것도 이와 같을 것 같다.

나를 볼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상태에서 나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타인의 시선이었다.

거울이 없는 삶을 살면서 내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유리 앞에 서거나 고인 물을 내려다 보거나 아니면 환각을 봐야 한다.

유리창은 차갑고 투명하며 상을 맺어주지 못하고 고인 물은 말이 없으며 작은 바람에도 흔들려 모습을 왜곡시킨다. 무엇도 나를 반사시켜 줄 수 있는 게 없다면 나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느낄 방법도 없다.


그러나

글쓰기를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다면 타인과의 만남은 얼마나 무가치한가?

그들은 머물러 있지도 않고 고요하지도 않으며 맑지도 않다. 그들 내부의 흔들림과 내부의 편견과 관념과 신념과 사상으로 나를 바라볼 텐데 그 되돌아오는 시선에서 나를 어떻게 건져 올린단 말인가?

타인의 시선은 언제나 타인의 삶을 통과해서 온다.

보는 사람마다 다르다고 하는 나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결국엔 나는 너희가 말하는 그 사람이 아니다고 외치게 된다.


어쩌면

이 진술 이후로 어떤 모임에서건 관계를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만약 그리된다면 나는 그 모임 자체로 만족하고 행복하고 충만된 시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관계를 기대하고 갔다가 어두운 밤 쓸쓸히 돌아오는 일은 더 이상 안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나에게 지지 않은 관심의 빚을 받으러 다녔고 아무도 줄 수 없는 것을 구걸하기 위해 깡통을

들고 헤매고 아무도 보지 못하는 투명한 몸에 투명한 망토를 입고 헤맸다.

사람을 만나서 나의 존재확인서를 구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자꾸 바람 새는 창문처럼 덜컹거리고 내가 지금 제대로 여기 있는가?

혼란스러움은 존재의 헐거움이었지 존재의 부재는 아니었다.


나는 관계를 기대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간에게 과도한 역할을 맡기려 했음을 인정한다.


이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빚진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겠는가?

빚을 받으면 끝나는 관계인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