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죽겠다는 사람에게 “오늘만 살자, 하루만 더 살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삶이 신성해서가 아니라 고통이 사고를 수축시키기 때문이다.
고통이 최대치에 이르면 고통은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고 선택지는 하나로 줄어들며 미래는 완전히 닫힌 것처럼 보인다.
이때 “죽는 것도 해결”이라는 생각은 객관적 결론이 아니라 고통이 만든 인지적 수축 상태다.
사고가 다시 넓어질 시간이 필요하다.
죽음은 해결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종료다.
고통은 변할 수 있고 의미는 나중에 생길 수도 있으며 관계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다시 열린다.
죽음은 고통을 끝내지만 변할 가능성도 함께 끝낸다.
“죽지 말라”는 말은 지금 이 상태가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이고 “하루만 더 살라”는 말은
삶의 찬양이 아니라 고통을 관리하는 기술에 가깝다.
평생은 견딜 수 없지만 오늘, 이 한 시간, 이 밤 하나는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
죽는 것도 해결일 만큼 힘든 상태를 왜 혼자 견뎌야 했는가.
그 지점에는 대부분 외로움과 소진, 붙잡아 줄 관계의 부재가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죽겠다는 말 앞에서 대부분 “죽지 말라”라고 말한다.
삶은 의무이고 죽음은 금지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심한 고통과 고립 속에서의 죽음은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압박 속에서 나온 결정일 가능성이 크다.
선택 능력 자체가 왜곡된 상태라면 죽음은 선택지로 인정되지 않는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은 최대한 보류해야 한다.
사회는 개인의 자유보다 연쇄 효과를 두려워한다. 죽음의 결과는 죽은 자 혼자만의 것이 아니다.
“죽어도 괜찮다”는 말은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거리두기 된 태도다.
삶을 신성화하지도 죽음을 악마화하지도 않는다.
삶과 죽음을 같은 선상에 올려놓음으로써 삶에 과도한 의미 부여를 거부한다.
너무 큰 의미의 삶은 숨이 막힌다. 삶도 선택이고 죽음도 선택이라면 사는 선택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의미 때문도, 희망 때문도 아니다. 죽어도 상관없지만 아직 종료하지 않기로 한 상태다.
의무도 집착도 아닌 삶에 집착하지 않은 채 지속되는 상태.
살아 있으니까 먹고, 보고, 걷고, 웃고, 기억을 더듬는다.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삶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비가 오니까 우산을 쓰는 것처럼 살아 있으니까 영화를 본다.
종료 역시 탈출도 해결도 금기도 아니다. 가능한 상태 변화 중 하나일 뿐이다.
종료해야 할 이유도 종료하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다.
사람이 무너질 때는 이유가 한쪽으로 몰린다. 반드시 끝내야 하거나 반드시 버텨야 하거나.
둘 다 균형적인 상태가 아니다.
삶을 정당화하지도 죽음을 낭만화하지도 않은 채 열려 있는 상태로 현재를 사는 것.
살아 있음에 더 이상 질문이 없는 상태.
그것이 늙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