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을 배워야 할 때.
이 영화가 오늘의 나에게 어떤 생각을 데려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영화가 지나간 자리에 하나의 문장이 남았다.
나는 전진만 해본 사람이다.
영화 속 그녀는 다섯 아이를 낳았고, 어느 순간 남편을 잃었다. 남편이 있을 때의 삶은 전진이었고,
남편이 없는 삶은 후진이었다. 그녀는 아이들 다섯을 태우고 후진으로 오십 년을 살았다.
삶의 밀도를 잃지 않은 채, 고난을 지나며, 끝까지 자신을 잃지 않고.
반면 나의 삶에는 후진이 없었다.
상실이 없었다는 말은, 상실할 기반이 없었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삶에는 꽤 능숙하다.
흔들릴 것이 없을 때의 삶, 현재를 유지하는 삶에는 익숙하다.
하지만 어려움이 닥칠 때, 실패와 좌절이 올 때, 나는 그것을 넘어갈 힘이 없다.
돈을 크게 잃었을 때, 나는 십 년을 멈춰 있었다.
암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살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내려놓고 싶었다.
타인의 어리석음을 견디지 못해, 차라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갔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나는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라, 멈추는 사람이라는 것을.
후진할 줄 몰라서. 아니, 후진을 해본 적이 없어서 막힌 길에 도착하면 그 자리에 서 있고, 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다른 틈이 보이면, 미꾸라지처럼 비비고 들어간다. 길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일단 옆으로 빠져나갈 수 있으면 된다.
이 방식은 나를 살게 했지만, 거절을 통과하는 경험은 남기지 않았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위해 몇 번의 신청을 했다.
처음 거절당했을 때는 다시 시도하지 않았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거절은 언제나 존재에 대한 부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세 번째 신청 후 또다시 거절을 확인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네 번째 신청을 했다.
그 순간, 분명히 알았다.
이번 거절은 존재에 대한 거절이 아니었다.
능력에 대한 판단도 아니었다.
그저 조건과 규정의 문제였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후진을 조금 배웠다. 후진은 나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사건을 통과하는 일이었다.
영화는 체제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 여성의 위대한 삶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그렇게만 두고 끝나도 괜찮다.
그러나 영화를 자신의 삶으로 가져오는 순간, 영화는 극적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된다.
자기 성찰이 가능할 때, 영화는 스크린을 벗어나 삶 안으로 들어온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많은 영화를 보아도 우리는 언제나 표면만 소비하게 된다.
영웅은 전설로 남고, 그 삶은 나와 무관한 이야기가 된다.
나는 아직 후진이 능숙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후진이 미숙한 것이 아니라,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의 평안은 흔들릴 것이 없어서 가능한 상태다.
언젠가 큰 상실이 온다면, 나는 여전히 서툴게 멈출지도 모른다.
그래도 이제는, 후진을 배울 준비가 되었다.
영화 I'm Steel Here 은 나에게는 삶의 후진을 가르쳐주는 운전교본 같은 영화였다.
덕분에 브런치에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무려 십 년이 걸린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