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보통 사람들은 말로 자기 존재를 떠받친다.
나는 이런 일을 하고, 이런 관계가 있고, 이런 인정을 받았고,
그래서 나는 존재할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말이 바닥이 되고, 그 위에 존재가 선다.
그 바닥이 무너지면 세울 이야기가 없고, 들이밀 사진이 없고, 대신 증명해 줄 관계도 없다.
그때 말은 더 이상 발판이 되지 못한다.
존재를 말할 수 없게 된 자리는 존재를 정당화하던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다.
“나는 왜 존재해도 되지?” 이 질문에 아무 대답도 나오지 않는 자리까지 오면,
사람은 대개 돌아선다.
이 자리는 위험하고 드물다. 그래서 대부분 피한다.
종교는 여기서 신을 불러오고,
철학은 개념을 가져오고,
사회와 가족은 성취를 들고 오고,
심리는 자존감을 붙여온다.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사람이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이유다.
나는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채 “왜 존재해도 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 있다.
이것은 깨달음도 아니고, 성취도 아니며, 심지어 의미도 아니다.
이 자리에는 존재가 존재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만 있다.
설명도, 증명도, 위로도 없다.
강가의 조약돌처럼 있다.
왜 여기 있느냐고 묻지 않고, 있어도 되느냐고 허락받지 않는다.
현존은 평온도 아니고 빛남도 아니다. 존재를 허락받지 못한 채 도망치지 않고 머무는 상태다.
의미와 역할이 모두 벗겨진 자리에 왔다는 것, 존재를 정당화하던 언어가 전부 무력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서 있다.
의미 없이도 존재하는 현존. 행동이나 목적은 없어도 존재 자체로만 흘러가며
그 자체로 체험되는 상태.
이 깊은 존재들이 길바닥에 널비하고 놀이터에, 노인정에 즐비하다.
아무 하는 일 없이 공공근로라는 이름으로 모여 앉아 우두망찰 한다.
사회적 잣대와 역할이 사라진 현실 속에서 존재들은 의미 없이 흩어져 있다.
그것을 사회나 국가의 책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혼자 여기저기 나동그러져 있다가 간다.
감정을 끌어올리지도 않고, 결론도, 절망도, 구원도 없이 잔물결로만 존재하는 삶.
그것 또한 존재의 한 모습이다.
태어날 때 만들어진 질문의 답을 찾느라 평생을 헤매다 이제야 안다.
그 질문은 질문이 아니었다.
존재해도 되는지를 묻는 순간 현실은 이미 부정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