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 메이드

완결

by 정오의 햇빛

하우스메이드는 여자의 삶을 그린 영화가 아니라 그냥 인간의 삶을 그린 영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자연스럽게 내 삶의 한 장면을 불러왔다.

남자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나의 전남편도 그 주인 남자와 비슷한 모습이었던 것 같다.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모습과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 무책임함과 이기적인 모습.

이건 그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처럼 보였다.


주어지는 극도의 책임감을 감당하기 위해 소모하는 삶 앞에서의 뒷모습은 그렇게 무책임해질 수밖에 없지.

자기의 삶이 없으니까. 늙은 여자, 젊은 여자 할 것 없이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냥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흥미롭게 자극적으로 그려낸 영화였다.


인간의 삶이 얼마나 쉽게 저런 모습으로 몰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영화


자신의 삶이 저렇게 몰아붙여진 삶이라는 걸 알아도 그런 삶을 지속하게 될까?

결국 자기 삶의 인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같다.

자신이 사는 삶이 자기의 선택이고 취향이라고 착각하는 한 그 삶에서 벗어날 길이 없으니까.


인간의 악함은 악함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부작용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삶을 살면 그런 그림자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거지. 그걸 그 개인의 선택이라거나 의도라고 보면서 비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근데 인간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려면 삶의 연결고리가 없어야 해. 그 사람에 의해서 내 삶이 영향을 받거나 피해를 본다면 그건 이해 차원 이해보다 자기 보호의 측면이 더 강한 상태가 되니까 상대를 이해한다고 해서 넘어갈 수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 구조로 보면 성직자는 그들의 삶의 깊이나 지성이나 사회의 능력보다 직접적인 삶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이 확보된다고 생각된다.


정신과 의사들이 삶의 깊은 계곡을 건너지 않고 학문적으로 접근해서 사람을 이해하는 일을 하는 것도 성직자의 경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주네. 전이될 요소가 적은 게 정신과 의사로서는 강점이 될 수 있으니까.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하게 된 건 내가 서있는 자리였다.

나는 사람과 관계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성장을 했고 그 집단에 속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서 외부의 시선으로 집단을 이해할 수 있는,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 것 같다.


삶은 자아형성의 토대이다.

본질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그 사람이 살아온 삶 위에 얹힌 것들.

악함은 삶의 부작용이고 무책임은 성격이 아니라 소모된 자리의 흔적이고

선택처럼 보이는 것들은 사실은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의 연장이다.

자아는 내가 만들어가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사람을 옳고 그르거나 선하거나 악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 사람의 사람됨을 판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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