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없음의 의미

다행이기도 한 기억 없음

by 정오의 햇빛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어렸을 때 아무 기억도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전혀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다.
조각처럼 남아 있는 기억들이 있다.

그 기억들은 대체로 행복하지도, 따뜻하지도, 포근하지도 않다.
약간의 충격, 설명하기 어려운 공포, 마음이 움츠러드는 장면들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끝내고 나자 이상하게도 한 생각이 조용히 떠올랐다.

기억이 없다는 건, 어쩌면 참 다행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이 없는 건 분명 아쉽다.
하지만 동시에 아프고 슬프고 끔찍하고, 괴롭고 처참하고, 차라리 죽고 싶다고 느껴질 만큼의 기억도
함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나는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서적 방치라는 말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으로, 피부로 느껴지는 폭행이나 폭력의 기억은 없다.
몸이 먼저 기억해 버리는 그런 종류의 상처는 내 안에 남아 있지 않다.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폭행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감각으로 하루를 살아갈까.

그 기억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계속 반응하는 현재일 것이다.
소리 하나, 시선 하나, 손길 하나에도 몸이 먼저 움츠러들고 아득해지는 경험.

그걸 상상하면 내가 비껴간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충분히 보호받지는 못했지만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앉아서 생각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기억의 빈자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아무 기억도 없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없었던 날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살아남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기억이 없다는 건 결핍이면서도 다른 의미에서의 보호받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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