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찾겠다 꾀꼬리 . 앵무새는 누가 죽였나.
사람들은 자꾸 주어를 바꾼다.
책임이 향하는 방향을 슬며시 틀어버린다.
말을 하다가도,
사고를 하다가도,
느끼는 순간에도.
어디선가 미묘하게 책임의 방향이 틀어진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엄마가 말한다.
“어머,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바닥이 잘못했어. 땟지, 땟지.”
저게 무슨 소리람.
아이를 위로하려는 말이라는 건 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보호의 언어.
그런데 그 순간 책임은 바닥으로 옮겨진다.
아이는 다치지 않았고, 바닥은 죄인이 된다.
나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았다.
테니스 코트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공을 놓친 사람들은 라켓을 들여다본다.
줄이 느슨한가. 구멍이라도 났나.
사실은 안다.
발이 늦었고, 집중이 흐트러졌다는 걸.
그런데도 라켓을 탓하는 몇 초가 있다.
그 몇 초가 불편하다. 도구가 문제였다고 말하고 있는 나.
오늘은 게임 도중 비가 내렸다.
“오늘 비 온다고 했나요?”
그가 묻는다.
나는 이미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는데
예보가 무슨 관계인가 싶다.
“예보가 지금 무슨 의미인가요? 비가 오고 있는데.”
그는 휴대폰을 꺼내 강수 확률 60%를 확인한다.
지금 내리는 비보다 휴대폰 속 숫자가 더 또렷해보였다.
공을 줍다가 건너편 코트에서 휠체어가 뒤집힌 걸 보았다.
깜짝 놀라 달려갔다.
어이쿠 내 공이 이렇게나 강력했나요?
웃자고 한마디 했지만 웃을 상황은 아닌 듯 했다.
연습이 끝난 뒤 내가 말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어요.
휠체어도 넘어뜨리고.”
그가 정정한다.
“휠체어가 넘어진 거예요.”
나는 다시 말한다.
“휠체어가 어떻게 혼자 넘어져요.
사람이 넘어뜨렸죠.”
우리는 종종 자신이 어떤 주어를 선택했는지 모른다.
설사 자신이 넘어진 것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해도
그게 무슨 의미란 말인가?
비도 내리고
공도 내리고
말도 내린 하루였다.
나이가 오십이 넘어도 바닥은 잘못했고 라켓은 의심스럽고
예보는 확인해야 하고 휠체어는 스스로 뒤집힌다.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자신을 직접 볼 수 없다.
그래서 글을 쓴다.
문장 속에서 주어를 찾아보려고.
내가 한 말의 방향을 내가 다시 읽어보려고.
글은 거울이다.
나는 거기서 조금 늦게 도착한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