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텍터

모성애는 광기와 닮아있다.

by 정오의 햇빛

감독 애드리언 그런버그

주연 밀라 요보비치


내가 본 프로텍터는 트라우마로 인한 망상장애환자인 엄마가 벌이는 악의 소탕전이었다.

엄마는 죽을 때까지 신디케이트조직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액션이 현실적 위기라기보다 엄마의 내면적 혼란과 왜곡된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 폭력의 연장상태.

현실에서는 그 폭력이 약자나 무고한 사람을 향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곤 하지. 영화속에서는 범죄조직을 향하고 있지만 광기의 폭력이라는 점은 동일하다.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것도 나름의 질서와 윤리를 가지고 진행해야 하는 것이 사회. 베트맨이나 슈퍼맨의 다른 버전. 미친 엄마버전.


엄마의 행동은 강박적이고 망상적이다.

엄마의 트라우마를 범죄집단에 투사하고 생명이 다할 때까지 싸우는 이야기.

엄마가 가지고 있는 정신병은 거의 대부분의 엄마가 가지고 있는 경미한 자식 중심망상과 현실왜곡 경향이다. 보통의 경우는 경미하고 자기 자식에게 한정되어 있는 왜곡이고 영화속 엄마의 경우는 딸의 유괴와 사망 딸과 나눈 마지막 대화 과거 삶의 익숙한 방식들이 섞여있다.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지워버리고 계속 재현되는 현재에 갇혀버린 엄마. 정신이 깨어날때마다, 딸이 옆에 존재하지 않는 걸 확인할 때마다 딸이 납치된 초기 상태로 세팅이 된다.


통제할 수 없는 프로텍터의 탄생.

영화속 주인공의 독백이 인상적이다.

주인공은 생과 사의 얄팍한 경계에 처할때마다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가. 이 일은 어떤 의미인가. 나는 왜 살아있는가. 내가 살아있는 것은 우연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딸의 죽음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자기의 존재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

유괴당한 소녀들을 구출하고 신디케이트를 제거하는 일이 엄마의 살아남은 존재로서 자신의 의미를 재확인하는 행위가 된다. 엄마는 착란상태에서 오로지 그 목적으로만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것도 나름 의미있어 보인다.

고도로 훈련된 인간병기가 사춘기 딸과 씨름하면서 보내기는 너무 아쉬운 재능이다.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모든 기술을 연마했지만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아무도 가르쳐주지도 않고 혼자 알아서 해야 하는 일.


나는 사십 살 된 딸이 항상 다섯 살처럼 보이는 것 같다. 돌봐야 할 것 같고 도와주어야 할 것 같고 이뻐해줘야 할 것 같고. 다섯살이 아니라 사십살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니키가 목숨을 걸고 조직 소탕전을 펼치듯이 나는 계속 다섯 살 아이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어한다. 똑같은 구조다.


기억을 못하는 것도 헷갈리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행동을 하고 있다. 그 유사성이 재미있었다.

영화의 내용은 너무 단순하다.

딸이 납치되어 죽는다. 엄마는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 죽인다. 계속 죽인다. 그리고 딸을 구출한다. 그런데 딸은 이미 죽었고 엄마는 망상장애에 빠져 계속 반복한다. 이게 전부이다. 그럼에도 보기 드물게 시원하게 보았다.


니키의 몸은 강해보이지 않았다. 왜소하고 빈약했는데 상상력으로 보는 영화. 기분좋은 영화였다. 행복했고 밤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뭔가 스트레스가 완전 해소된 듯한 경험.


더 끔찍하고 무섭고 공포스러웠던 영화는 기억의 방이었다.

기억이 지워진채로 살아가던 남자가 기억을 되살리면서 더이상

살 수 없어 죽는 영화. 정말 무서웠다.

지운 기억을 되살린다는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프로텍터에서도 엄마가 자기 딸이 죽었다는 기억을 되살리면 아마 살아있기 힘들 것 같다.

영화속에서 딸이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는 모두를 위해서 싸웠지만 나를 위해서는 싸우지 않았다는 말.


세상의 딸을 위해 싸우게 된 엄마의 남은 삶.


우리의 정신은 얼마나 섬세하고 얼마나 연약한가

말한마디에 붕괴되고 눈빛 하나에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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