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여행

콜럼비아 영화는 처음보는 듯.

by 정오의 햇빛

사건이 나오지 않는 영화였다.
장면은 계속 바뀌는데 이야기가 시작되지 않는다.
언제 시작되려나 힘을 주고 기다리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손이 풀린다.

하루가 지나자, 먼 바다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던 파도가 비로소 해변에 닿은 것처럼
그 영화가 ‘느낌’으로 도착했다.


<바람의 여행>은
어쩌면 아코디언의 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그 여정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잠시 함께 걷는 동반자다.

아코디언은 찢기고, 빼앗기고, 떠돌며 고난을 겪는다.

그러다 결국 원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영화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들판에서 두 사람이 구덩이를 판다.
어느새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례를 치른다.

누가 죽었는지, 왜 죽었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소중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정작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것이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


소년은 남자를 따라 길을 나선다.

“사랑하는 여자예요. 결혼할 거예요.”

소년의 말에 남자는 말한다.

“나는 한 여자를 만나는 데 10년이 걸렸어.
그 여자를 두고 네가 나를 따라 나선 건 참 어리석은 일이야.”


그 말은 충고라기보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무게처럼 들린다.

아코디언을 들고 떠돌던 시간, 사랑하는 사람과 충분히 함께하지 못한 시간,
그리고 결국 잃어버린 시간. 그 모든 것이 짧은 문장 안에 담겨 있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말을 하고 나서 잠시 멈춘다.

그 말이 ‘정보’가 아니라 ‘느낌’으로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나는 생각한다.

나는 왜 그렇게 빨리 대답하려 했을까.
나는 상대의 말을 이해하려 했지, 느끼려 하지는 않았던 것은 아닐까.

느낌 없이 오가는 대화는 어긋난 정보들만 남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어딘가 닿지 않는 공기가 흐른다.


관계도, 배움도 비슷하다.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구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오래 함께 있는 동안 어느 순간 스며든다.

식혜처럼. 온기를 유지하고 시간을 기다리면 어느 순간 밥알이 하나둘 떠오르듯,

이 영화의 장면들도 늦게서야 내 안에서 떠오른다.


사건은 없었고, 이야기는 끝내 시작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영화는 이미 나를 충분히 통과했다.

장면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른 자리에서 계속 떠오른다.
영화에서 감독에게로, 그리고 다시 나의 삶으로.


아코디언은 결국 자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갔다.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이미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는걸까?


사람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어느순간 사람이 사라지고 무엇인가만 남아 있었다.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보이지 않는 바람을 보게 하는 영화.

어쩌면 이제 사람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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