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니 던
도니 던 그는 웃기지 못하는 코미디언이다.
무대도 없고 팬도 없다.
돈 없는 마사에게 차를 한잔 대접했는데 스토킹이 시작된다.
도니는 마사의 위험성을 알고 나서도 신고하지 않는다.
점점 수위는 높아지고 억제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도니의 삶에 위협이 되고 있는데도 마사를 적극적으로 제지 하지 않는다.
도니는 왜 그 관계를 끊지 않는걸까?
1.팬은 아니지만 자기에게 열광하는 대상이 주는 기묘한 만족감일까?
2.마사에 대한 연민을 멈추지 못하는 걸까?
3.웃지 않는 관걕들에게서 얻지 못한 인정일까?
4.누군가 자신에게 집착하는 것이 주는 쾌감일까?
도니는 마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마사가 만들어주는 감각에 중독되어 있다.
무대에서는 아무도 안 웃지만 마사는 과장되게 웃어준다.
일상에서도 오직 마사만이 도니에게 열광한다.
특별함을 느끼게 해주는 마사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도니가 필요로 하는 것을 마사가 주고있다.
내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관계도 그랬던 것 같다.
나는 딱히 관심은 없지만 상대가 적극적이면 따라가는 정도.
굳이 관계를 막을 이유도 없고 나에게 큰 위협이나 피해가 오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나에게 유익도 있고
홀로 있는 무료한 시간을 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 관계들은 지속되지 않는다.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원래 없었던 것 처럼 사라진다.
생각해보니 다 그런 것 같다.
가족관계조차도.
나의 관계방식은 사물수준인것 같다.
서로에게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만 지속된다.
필요로 하지 않는 관계가 이어질 수는 있는 것인가?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도 시청자가 필요로 하는 순간까지만 유효하다.
팬들이 없어지면 화면에 나오지 않는다.
뭐가 다른가.
한때 관계는 어느 정도 강제되는 구조 안에 있었다.
가족, 마을, 직장, 공동체.
좋든 싫든 같이 있어야 했고, 함께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 안에서는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냥 같이 있는 것이 관계의 시작이자 유지였다.
지금은 다르다.
원하면 만나고 원하지 않으면 떠난다.
관계는 선택이 되었고 선택에는 기준이 생겼다.
시간, 에너지, 감정. 우리는 자연스럽게 가성비를 따진다.
이건 진보다. 원하지 않는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억지로 참고, 버티고, 견디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동시에 하나가 사라졌다.
이유 없이 함께 있는 시간.
도니 던은 위험한 관계에 머문다.
그 관계는 분명 잘못되었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 안에는 ‘함께 있음’이 있다.
이유를 따지지 않는, 가성비를 계산하지 않는 지속되는 시간.
반대로 나는 그 시간을 거의 가지지 않는다.
관계는 늘 선택의 문제였고 선택에는 늘 계산이 따라왔다.
이 사람을 만날 가치가 있는지, 시간을 쓸 이유가 있는지.
그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면 관계는 시작되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의 관계는 이상하게도 이렇게 된다.
모두가 자유롭지만 함께 있지는 않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 남아 있지 않는다.
대신 혼자 있어도 괜찮을 이유를 찾는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견디는 방식은 달라졌다.
이전에는 관계 안에서 버텼고, 지금은 관계 밖에서 버틴다.
그래서인지 관계는 점점 짧아진다.
필요할 때 시작되고 필요가 끝나면 사라진다.
남는 것은 지속이 아니라 순간이다.
문제는
이게 틀렸느냐가 아니다.
이게 전부냐는 것이다.
이유 없이 함께 있는 시간은 정말로 사라진 걸까.
아니면 우리가 너무 빨리 이유를 찾고 있는 걸까.
도니 던은 잘못된 방식으로라도 함께 있는 시간을 붙잡는다.
나는 괜찮은 관계조차 시작되기 전에 놓친다.
어쩌면 지금 필요한 건 좋은 사람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유 없이 조금 더 함께 있어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가성비가 맞지 않아도 당장 의미가 없어도 설명할 수 없어도 그 시간을 조금만 더 허용하는 것.
관계는 그렇게 시작되기도 하니까.
거절할 관계조차도 없는 지금이다.
한때는 거절해야 할 관계들이 있었다.
부담스러운 연락, 애매한 호의, 끊어내야 할 사람들.
관계는 넘쳤고 문제는 정리였다.
지금은 다르다.
거절할 것이 없다.
연락도 없고, 다가오는 사람도 없고, 굳이 선을 그을 일도 없다.
이건 편안하다.
설명할 필요도 없고, 감정을 소모할 일도 없다.
관계를 정리하는 에너지가 아예 들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조용한 방식으로 남는다.
이전에는 관계가 많아서 피로했고, 지금은 관계가 없어서 정적이다.
거절할 관계가 없다는 건 선택할 관계도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누군가 다가오면 받을지 말지 고민할 수라도 있는데,
지금은 그 고민 자체가 없다.
그래서 판단도 멈춘다.
이 사람이 좋은지, 만나고 싶은지, 조금 더 있어볼 만한지.
그 모든 감각이 쓸 일이 없어진다.
감각은 쓰지 않으면 흐려진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때 관계를 너무 빨리 끝내는 사람이었고,
지금은 시작 자체가 없는 상태에 가깝다.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가볍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
그래서 요즘은 거절할 관계를 기다리기보다, 아주 작은 접점을 만들어보려고 한다.
길게 이어질 필요도 없고, 특별할 필요도 없다.
잠깐 말을 섞고, 짧게 머물고, 어색한 시간을 견디는 것.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시 관계를 만들겠다는 생각보다 감각을 다시 쓰겠다는 쪽에 가깝다.
거절할 관계가 없다는 건 끝난 상태가 아니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상태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거절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은 하루로 본다.
아껴둔 시간은 멍하게 앉아 있거나 넷플릭스를 때려보거나 유튜브를 죽기 살기로 보는데에 씌인다.
열렬히 맺는 관계는 비용지불없고 스트레스 없고 오직 자극과 흥미충족으로 가득하다.
사람에게서 받을 수 있는 자극은 스트레스로 오고 매체에서 받는 자극은 아무리 자극적이어도 끝은 지루하고
공허로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