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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Mar 08. 2021

나랑 친하게 지내고 싶어

관계에 대한 본질적 고찰

  평소에 거울을 잘 보지 않는 편이다. 한창 외모에 예민할 때는 거울을 꽤 자주 봤지만, 지금은 보이는 만큼만 보고 산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거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스로마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라는 목동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우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빠져 죽은 나르시스를 떠올리면, 내 안의 나르시시즘을 들킨 것 같아 괜히 부끄러웠다. 내 외모는 아닐지라도, 나의 시선은 평생 나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취미를 배우는 근원적인 이유에는 ‘내’가 있었다. 취미는 나를 알기 위한 수단이었다. 운동은 내 몸에 관심을 가지고 정성으로 보살피는 작업이었다. 살사, 여행, 바둑, 그림은 새로운 세계가 알고 싶어서 시작했지만, 그 밑바탕에는 내가 모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살사공연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전전긍긍할 때도, 사실은 다른 사람들 시선에 보이는 내 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의 확장이었다. 취미를 통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 더 좋은 사람과 덜 좋은 사람이 생겼다. 특별히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신경이 쓰였다. 그땐 상대방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내 취향의 문제였다.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었지만 내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준은 있었다. 그 기준은 내 개인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었다.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거나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감정이 생겼다. 반대로 아직 내가 극복하지 못한 문제나 나와 같은 결핍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견하면 그 사람이 꺼려졌다. 일종의 자기혐오였다.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나는 별다른 호불호가 없을 때도 있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은 사람은 나와 부딪히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모임에서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 있었다.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는데 좋게 말하면 리더십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독단적이었다. 주도적인 모습은 그 사람의 개성이었지만, 그 사람의 나쁜 면만 두드러지게 보였다. 한마디를 해도 그 사람이 말하면 아니꼽게 들렸다. 그와 엮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때, 내 시선은 이미 온통 그를 향해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영향받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시기에 회사에서 강압적인 태도로 사람들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말투나 행동에 힘이 들어갔지만, 잘 고쳐지지 않아서 애를 먹을 때였다. 나에 대한 불만을 그에게 투사하고 미워했다. 


  몇 년이 지나고, 우연히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는 여전했지만, 그런 그의 태도가 예전처럼 거슬리지 않았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주도권 문제를 해결하고 난 후였다. 내 취향은 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시작했다. 사람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에 불과했다.


  심리테스트로 사람을 배우면서 가장 잘 알게 된 사람도 나였다. 나는 유일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지만, 심리테스트에서는 나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장단점이 있는 한 유형의 인간에 불과했다. 세상에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위로가 되었다.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릴 때의 기억과 경험에 비춰보기도 하고, 주위 사람들과 생활환경의 맥락을 다양한 각도로 살폈다. 다른 사람을 보듯이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나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자라났다. 나는 나 자신의 보호자였다.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분명해지면서 스트레스 상황이 줄었다. 해야 할 것은 줄고 하고 싶은 것이 늘어났다. 내가 편하면 주위 사람에게도 너그러웠다. 나에게 잘해주지 않고 다른사람과 잘 지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는 시작이자 끝이었다.


  나를 이해하는 만큼 상대방도 이해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었다. 내가 경험하고 이해한 감정에 빗대어 타인을 이해하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내 두 눈은 밖을 향하고 있는 탓에 세상은 무한정 볼 수 있지만 나 자신은 알아챌 길이 없다. 눈앞의 천사와 악마들이야말로 나를 보여주는 유일한 수단인 것 같다. 세상은 지금도 빠르고 화려하고, 어쩌면 앞으로 더 정신없겠지만, 눈앞의 세상을 통해 나를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도 나와 잘 지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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