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미
[지나온 이야기]
1999年 9月 14日
울산에서 아산으로.
고향을 버리고 타지로 온 지 2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아빠에게 사고가 났다.
아침 출근길에 난 교통사고.
그것도 큰 트레일러가 낸 뺑소니.
목격자도 없는 이른 시간이라
아빠는 사고 직후 논두렁으로 떨어진
자동차와 함께 그렇게 우리와 이별했다.
그날, 아빠 회사 동료 아저씨가
나와 동생을 데리러 학교에 오셨다.
2교시가 끝나고 오신 아저씨는
아빠가 지금 다쳐서 병원에 계신다고 하셨다.
아저씬 우리가 학교에서 점심을 다 먹을 때까지
멀찍이 바라보면서 기다려주셨다.
나는 아빠가 다쳐 마음이 쓰였지만,
기다려주신다는 아저씨의 말씀에
‘심각한 상황은 아닌가 보다’
하고 넘겨짚으며 친구들과 꽤 즐거운 지냈다.
나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점심을 먹은 우리는 병원이 아닌
커다란 호숫가에 갔다.
그리고 아저씬 나에게 큰 호수 앞에서
무슨 이야기들을 하셨다.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아마도 희망을 전하고 싶으셨겠지.
그러나 내 마음은 달랐다.
곧바로 병원으로 가지 않고 호수로 가는 이 상황이
불안했다.
초조했다.
머리위로 커다란 상자가 쿵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많이 다쳤나 봐. 어떡해.
난 그것도 모르고 애들이랑 신나게 놀았는데..’
병원으로 향하는 동안 머리가 멍하고
손발이 덜덜 떨렸다.
온몸이 저릿저릿했다.
병원으로 들어온 차는 병원까지 가지 않고,
옆길로 가 장례식장 앞에 주차했다.
‘병원에 가려면 좀 더 들어가야 하는데
왜 아저씨는 여기에 주차하시지?’
이제 모든 상황이 정리가 됐다.
상황판단은 됐지만,
현실감은 제로.
나는 차에서 쉽사리 내리질 못했다.
갑자기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아빠와의
모든 추억이 빠르게 지나갔다.
마지막 파노라마에 신나게 노는 내 모습.
후회가 몰려왔다.
정말 많은 사람이 조문을 왔다.
엄마와 나는 수시로 쓰러져 병원을 드나들었다.
상황을 잘 모르는 동생은 장례식장 구석에
커다란 옷을 덮고 곤히 자고 있었다.
그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1살에 나는 아빠를 잃었다.
그리고
그 시절, 엄마는 지금의 내 나이였다.
[현재 이야기]
얼마 전, 큰엄마께서 돌아가셨다.
제주도에 있는 난 급한 이별에
비행기를 타지 못해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그저, 슬픈 마음만 함께했다.
그리고 동생과 함께 큰엄마의 49재에 참석했다.
거기서 정말 오랜만에 고모를 뵈었다.
그 시절, 엄마에게 아빠를 잡아먹은 년이라며
욕하고 연락도 하지 않던 고몬데.
어째 지금은 엄마와 고모는 사이가 꽤 괜찮아 보였다.
세월이 흘러 엄마는 용서가 된 걸까.
난 아직도 그다지 용서는 안 되는데.
아무튼, 우린 49재가 끝나고
고모와 카페에서 차를 마셨다.
엄마가 말했다.
“얘네 사실은 불쌍한 애들이에요.
우리 애들, 괜찮아 보여도 상처가 참 많은 애들이야.”
엄마의 말에 우린
“우리가 무슨”
가벼운 부정을 했지만,
엄마의 그 말에 내심 놀랐다.
큰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아빠 이야기를 주고받는 날이 오다니.
그날의 이야기를 다시금 하는 날이 있다니.
그 날 이야기는 우리에게
암묵적인 금기어 같은 거였는데.
나는 고모의 입으로
발인 날, 아빠를 보기 위해
발버둥 치던 나의 위력을 다시금 들었다.
겪으면서도 얼떨떨했던 그 기억.
지워지지도 흐려지지도 않고
더욱 선명해지기만 하는 기억.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날 엄마의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우리보고 불쌍한 아이들이라니.'
나는 생각했다.
그 시절 엄마의 슬픔은 누가 알아주나.
엄마의 아픔과 상처는 어디로 간 걸까.
사실은 제일 불쌍한 건 우리가 아니라 엄마 아닌가.
이제야 알았다.
우린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세월을 보낸
모녀였다.
아빠 없는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
노력했을 엄마를 떠올렸다.
그렇게 상처를 덮으며 보내던 시간은 흘렀다.
그 시절 엄마의 나이가 된 내가
우리가 보내온 시간을 보니,
나는 남편을 잃은 엄마를
엄마는 아빠를 잃은 자식을
그렇게 안쓰러워하며 살아온 것이다.
서로서로 불쌍히 여기고
또 어루만지면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저 그뿐이었다.
딱히 입 밖으로 내어놓진 않았지만,
서로를 위해 삼키고 또 삼키는 시간은
지금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