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약자로 살아왔다. 학창시절에는 키가 작고 왜소했기 때문에 종종 친구들에게 무시를 당했다. 남중, 남고를 나왔기 때문에 거의 정글의 세계였다. 힘이 모든 서열을 정하고 규칙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서 힘이 없는 약자는 강자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기분에 맞춰서 조심하고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약자가 모두 약자는 아니다. 어떤 약자는 강자에게 한없이 움츠러드는 반면 어떤 약자는 밟으면 꿈틀거리는 사람이 있다. 꿈틀거리는데서 멈추지 않고 달려들어서 귀라도 깨무는 약자가 있다. 자기가 더 맞을지언정 달려들어서 뒤통수라도 한대 때리는 약자가 있다. 강자도 두려움이 있다. 강자도 맞기 싫고 다치기가 싫다. 그래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약자는 지속적으로 괴롭히지만 제대로 된 반항을 하는 약자에게는 무조건적으로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싸우면 본인이 이기긴 하지만 반항을 하기 때문에 본인도 다칠 각오를 해야하기 때문이다. 리스크가 있는 괴롭힘, 혹은 싸움인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괴롭히지 않고 본인이 정말 화가나거나 다칠 각오를 할때만 괴롭히거나 싸운다. 그래서 왠만하면 건드리지 않고 더 고분고분하게 자기의 괴롭힘을 받아들이는 약자들을 찾아나서는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나는 학창시절에 대부분 약자로 살았다. 싸움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고 강자들, 소위말하면 일진들 사이에서 그들의 눈에 들지 않기 위해 눈치를 봤다. 그럼에도 나는 약자의 반항을 경험한 적이 있다. 중학생때 일진은 아니고 나보다 조금 싸움을 잘하는 친구가 한명 있었다. 그 친구가 청소시간에 청소를 안하고 뺀질거렸다. 나는 그게 마음에 안들었고 청소를 하라고 말했다. 그 친구가 다가와서 "죽을래?"라고 말했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자존심이 상했다. 싸움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었서 무섭기도 했지만 그 말을 듣고 물러설순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같이 욕을 하고 싸움을 했다. 물론 싸움은 내가 졌다. 한대정도 때리고 2~3대를 맞고 마지막에 명치를 맞아서 무릎을 꿇었다. 싸움은 내가 졌지만 그 친구는 그 다음부터 나를 조심하는게 느껴졌다. 싸움하기 전에는 은근히 나를 무시하고 친구들에게 싫어하는 티를 냈었다. 나도 그게 느껴져서 그 친구가 청소시간에 딴짓을 하는게 유독 싫게 느껴졌다. 그 싸움 이후에 그 친구는 더이상 나를 대놓고 무시하거나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나를 무서워했던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 전보다는 조심스러워한게 느껴졌다. 내가 밟으면 꿈틀한다는 걸 체감한 것 같았다.
군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이등병때 우리 생활에서 악질 선임이 한명 있었다. 그 선임은 상병이었는데 생활관에서 실세였다. 군번이 잘 풀려서 자기 위에 1명의 선임만 있었는데 그 선임은 조용한 성격이라 거의 본인이 생활관에서 왕처럼 지냈다. 이 놈은 다른 선임들과 달리 악질이었다. 나랑 내 동기가 처음 생활관에 들어갔을때부터 크고 작은 괴롭힘을 가했다. 그때가 2011년이었니 군대에서 폭력은 거의 사라졌을때다. 이 놈 말고는 때리는 선임은 사실 없었다. 근데 이 놈은 심심할때마다 우리를 때렸다. 얼굴을 때리진 않았지만 만 팔과 몸통을 주먹으로 퍽퍽 내려쳤다. 그리고 폭언도 많이 했다. 샤워할때 우리에게 소변도 눴었다. 이 놈의 지속적인 괴롭힘이 힘들어서 우리는 소원수리에 이 선임을 썼었다. 쓰기 전에 많이 고민했다. 군대에서 소원수리를 쓰는 건 쉽지 않다. 비밀보장이 된다고 하지만 사실상 비밀보장이 될 수 없다. 그 선임이 보통 특정대상만을 괴롭히기 때문에 소원수리로 그 선임이 어떤 징계를 받게되면 무조건 괴롭힘 당한 대상이 소원수리를 썼다는 걸 알게된다. 만에하나 그 선임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안 가게 되면 오히려 복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혹은 다른 선임들에게 찍혀서 왕따가 될 수도 있다. 그만큼 소원수리는 부담이 있는 행위이다. 다행히 나는 혼자가 아니라 동기가 같이 있어서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아마 혼자였으면 소원수리를 못 썼을 것 같다. 동기와 고민을 하다가 결국 우리는 소원수리를 썼고 그 선임은 징계를 받고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갔다. 우리가 소원수리를 쓴게 알려졌고 우리는 두려웠다. 부대에서 소원수리를 쓴 약한 사람으로 낙인이 찍히고 동기, 선임, 그리고 나중에 후임들에게도 무시를 당하고 보복 혹은 따돌림을 당할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생각보다 다른 선임들의 복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다른 선임들도 무서웠을 것이다. 우리는 한번 소원수리를 쓴 사람들이고 언제 또 자기들이 괴롭히면 우리가 소원수리를 쓸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선임들도 그 괴롭혔던 선임이 악질인 것도 인지를 하고 있었다. 다만 자기보다 선임이기도 하고 굳이 나서서 우리를 지켜줘야하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리를 비난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관계가 좋아져서 잘 지냈다. 괴롭혔던 선임이 언제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자연스럽고 편하게 군대가 굴러갔다. 혼자가 아니라 동기가 있어서 낼 수 있던 용기지만 그 하나의 꿈틀거림이 우리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사람들로 만들어줬다.
선생님이 해준 말씀이 생각난다. 강자들도 두려움이 없는게 아니다. 강자들도 무섭다. 다만 약자들이 더 무서워하고 반항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약자들만 골라서 괴롭히는 것이다. 이 논리는 회사에서도 통한다. 회사에서도 상사는 자기 말을 항상 잘 듣고 위축되어 있는 후배를 건드리고 괴롭힌다. 만만하게 보이는 후배들에게는 더 막대한다. 하지만 뭔가 자기 말을 안 듣고 뭔가 당당해보이는 후배들에게는 막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눈치를 볼때도 있다. 물론 후배가 명백히 잘못을 하면 지적하고 혼내긴 하지만 말이다. 나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이게 느껴졌다. 나는 만만한 후배는 아니다. 회사를 다니면서 연차도 차고 타고난 목소리와 인상이 있다. 내면의 강함보다 겉모습으로 나오는 강함이 있다. 내가 원래 가진 모습도 있고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서 만들어낸 강함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런 모습때문에 상사들이 나에게 함부러 대하지 않는다. 나랑 동갑이고 직급도 같지만 좀 더 유약하고 자기한테 비위를 잘 맞추는 동기에게는 종종 부당하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 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하진 않는다.
우리 같은 약자는 밟으면 꿈틀거려야된다. 실제로 꿈틀거리지 않더라도 꿈틀거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줘야된다. 물론 꿈틀거리다가 실제로 짓밟힐 수도 있다. 1대 맞고 끝날 걸 10대로 맞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함부로 꿈틀거려서도 안된다. 꿈틀거린 대가를 고민해야되고 내가 감당할 수 있을지도 고민해야한다. 하지만 그 고민 끝에 내가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맞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꿈틀거리는게 낫다. 가능하면 꿈틀거리는 것에서 더 나아가서 나도 한대 때려야된다. 10대 더 맞을 각오를 하고 1~2대를 더 때려야한다. 그래야 괴롭힘과 위축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약자에서 벗어나서 강자가 되고 싶다. '안 싸워야될 때 싸우면 바보지만 싸워야 될 때 안 싸우는 건 더 바보'라는 말이 기억난다. 나 또한 약자를 괴롭히진 않지만 싸워야 될때는 싸울 수 있는 사람이 되고싶다. 그런 당당함을 가진 사람이 되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