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관련 책을 읽다보면 무용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한다. 장자는 왜 무용에 대해 얘기했을까? 장자가 무용을 긍정한 것이 단지 체제가 정한 유용함의 반발심 때문은 아닐테다. 무용이 주는 가치가 있기에 장자는 무용을 강조했을 것 같다. 무용의 가치는 무엇이 있을까?
체제의 유용함이 해로움이 되고, 체제의 무용함이 이로움이 될 때
체제의 유용함이 개인에게 해로움이 되고 체제의 무용함이 개인에게 이로움이 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기업에서 일을 하다가 과로로 병을 얻는 사람, 오랫동안 사회에서 시키는 일을 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못 해보는 사람 등 체제 안에서 유용함이 개인에게 해가 되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피부로 느낀 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학이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우리 때도 지방 고등학생의 최고의 목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는 것이었다. 나는 적당한 공부와 좋은 운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왔다. 반면에 나와 가장 친한 친구는 당시에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아 지방에 있는 대학을 갔다. 당시에 나는 철없던 생각으로 앞으로 내가 친구보다 더 성공한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이 지방에 있는 대학보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 더 좋다고 했고 대학에 가니 박수를 쳐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 후 10년 정도가 지나니 꼭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역에 있는 공기업에 들어갔다. 급여가 서울에 있는 대기업만큼 높지 않았지만 생활에 부족함은 없었다. 집값이 서울에 비해 훨씬 저렴했고 서울처럼 복잡하지 않기에 삶에 여유가 있었다. 반면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급여를 많이주는 기업에 들어갔지만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출퇴근이 1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고 주로 작은 원룸에서 생활했다. 매일 출퇴근과 업무에 치이고 미래에 내 집 마련을 생각하니 현실의 행복은 저 멀리 날아가있었다. 철없던 시절 행복이 성적순, 대학순이고 서울에 있는 대학을 와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다른 친구들도 지방에서 더 여유롭고 개인의 삶을 즐기며 살고 있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서울로 대학을 온 친구들 중에는 항상 뭔가에 쫓겨있는 친구들이 많았고 지방에 있는 친구들은 여유로운 친구들이 많았다. 체제에서 옳다고 하는 것이 꼭 개인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시간이 지나고 어느정도 알게 됐다.
무용이 주는 가벼움
무용이 주는 가벼움을 느낀 적이 있다. 사업을 할 때였다. 당시에 했던 사업은 유튜버 매니지먼트 사업이었다. 2014년도였고 유튜브가 국내에서 새로운 미디어로 각광을 받기 시작할 때였다. 지금은 유튜버가 돈도 많이 벌고 하나의 직업으로 인정받지만 당시만 해도 그렇게까지 인정받거나 주목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안 좋게 보는 사람들은 '신흥관종'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그렇기에 당시에 유튜버를 하는 사람들은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는 소위 비주류였다. 일반적인 루트대로 대학을 가거나 취업을 준비하지 않고 게임, 화장, 패션, 개그 등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에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튜브라는 새로운 매체가 나오니 쉽게 시작을 했다. 회사에 다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크게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호기심이 가고 재밌을 것 같으면 쉽게 시작을 했다. 반면에 나와 비슷하게 대학을 나오고 회사를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유튜브에 관심이 있어도 시작을 하지 못했다. 부끄럽기도 하고 혹시나 누가 알아봤을 때 괜히 욕을 먹거나 잃을 것들이 두렵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서 보니 당시 사회적 기준으로 무용하다고 여겨졌던 친구들은 유튜브를 시작해서 크고 작은 성취를 이루었다. 큰 성취를 못 이뤄도 본인이 하고 싶은 걸 시도하고 경험해봤다. 반면에 사회적 기준으로 유용했던 친구들,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 친구들은 유튜브에 관심이 있어도 결국 시도를 못했다. 잃을 것이 많았기에 호기심이 있었지만 시도조차 못 해봤고 여전히 같은 일상을 지내고 있다.
돌이켜보면 체제에서의 유용함은 사람을 더 평범하게 만드는 것 같다. 체제 안에서 유용하면 분명 자신의 자리가 있다. 유용하기에 써주는 곳이 있고 그에 맞는 보상을 주는 곳이 있다. 체제는 본인에게 유용한 사람을 기르기 위해 기준을 충족하면 그에 따른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체제가 보장해주는 자리와 보상이 모두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마케팅, 경영전략보다 글쓰기가 더 좋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컴퓨터 코딩보다 음악이 더 좋을 수 있다. 하지만 한번 체제의 유용함에 빠지면 거기서 헤어나기가 어렵다. 포기해야 될 것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애초에 체제로부터 무용했던 사람들이 더 자신의 개성을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든다.
무용과 도행지이성
체제의 기준으로부터 무용하다는 것은 생계의 위협을 각오해야되는 일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활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돈을 벌기 가장 쉬운 방법은 체제가 정한 길을 따라서 인재가 된 뒤에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고 돈을 버는 것이다. 대학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오고, 어느정도 실력이 쌓이면 취업을 해서 그들이 원하는 일을 해주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내가 그들을 위해 공부하고 노력했던 시간들에 대해 보상을 준다. 이것이 체제가 유용한 사람을 기르고 보상을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체제 밖에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체제가 정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열심히 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에게 유용함을 줘서 필요한 돈을 벌어야된다. 이는 정해진 루트가 없다. '대학->학위-> 자격증->취업'처럼 체제 내의 길은 어느정도 정해져있는 반면에 체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본인만의 루트를 개척해야 된다. 그렇기에 막연하고 불안하고 어렵다. 체제 안에서 순응적으로 살았던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루트를 개척한다는 건 더욱 어렵기도 하다.
무용을 강조했던 장자가 도행지이성을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알겠다. 체제 안에서의 유용함은 이미 잘 닦아놓은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 같지만 체제 밖에서 살려는 사람은 흙길에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 수 밖에 없다. 그 길은 각자만의 방향과 방식으로 만드는 것이고, 그렇기에 자신이 걸어온 것이 곧 길일 수 밖에 없다. 있어서 걸은 것이 아니라 걸어가니까 뒤에 생긴 것. 그것이 체제 밖에서 유용함을 따르는 사람들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