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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 May 19. 2024

007. 만년필 세척의 날

게르은 자여 귀찮음을 이겨내라


세척 洗滌 : 깨끗이 씻음.

만년필을 쓰면 세척을 해야 한다.

만년필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잉크를 주입하여 쓰는 필기구로 잉크는 카트리지와 컨버터를 이용해서 주입한다. 카트리지는 잉크가 들어있어 일회성이라 편리하고 컨버터는 잉크를 직접 주입해서 사용하기 때문에 다양한 잉크를 사용할 수 있다. 편한 것은 카트리지지만 잉크가 많은 나는 컨버터를 더 선호하는 편이다. 컨버터를 자주 사용한다는 것은 세척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잉크를 다 쓰고 나면 다 쓴 카트리지는 버리고 새로운 카트리지를 끼우면 되지만 컨버터는 잉크잔여물을 씻어서 말리고 다시 잉크를 주입해서 써야 한다. 그건 매우 귀찮은 일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 세척은 너무 귀찮다.

나는 만년필이 꽤 많기 때문이다. 100만 원대의 몽블랑 만년필(선물 받았다)부터 8000원대의 진하오 만년필까지 다양한 만년필을 가지고 있다. 비싼 만년필은 그만큼 비싼 값을 해서 예쁘고 부드럽게 잘 써진다. 하지만 하나만 쓰면 너무 지겨워진다.(끈기 없는 나 재등장) 립스틱은 하늘아래 같은 색이 없다는 말이 있다던데 잉크도 하늘아래 같은 잉크 없다. 같은 파랑이라도 어찌나 다양한 색의 파랑이 있는지 여러 잉크를 쓰다 보면 그 영롱한 색감에 홀딱 반하고 만다. 그러니 만년필은 하나만 쓸 수 없다.


만년필의 세계는 어마어마해서 한번 발을 들이면 곳간 털리는 거 순식간이다.(만년필만큼 잉크도 많다는 얘기) 원래 취미생활에는 돈이 드는 법이다. 취미생활을 위해 돈 버는 사람입니다, 제가. 역시나 실력보다 도구에 집중하는 인간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만년필을 사모으다 보니 잉크도 사모으게 되고 그렇게 이 만년필, 저 만년필, 이 잉크, 저 잉크 다 손댄 자의 최후는 수십 자루의 만년필 세척만이 남았다.


여러분은 지금 세척하다 허리 나갈 뻔한 어리석은 인간을 보고 계십니다.

씻고 씻고 또 씻으며 만년필을 째려보기도 했지만 역시 나는 만년필이 좋다. 다음 세척의 날에 또 구시렁대겠지만 새로운 잉크를 넣어 쓸 생각에 또 신나고 말았다. 만년필을 세척하며 마음도 조금은 세척이 됐나 보다. 뽀득뽀득 만년필도 세척하고, 잉크에 물든 손도 세척하고, 덤으로 마음도 세척하고. 일석삼조다.


_ 이번에 세척한 만년필. 이거 말고 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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