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리 Jun 14. 2024

032. 밤산책

터벅터벅

터벅터벅

느릿느릿 힘없는 걸음으로 걸어가는 모양.


여름을 맞이하여 페디큐어를 받았다. 시원한 바다가 생각나는 파란색으로 발톱을 꾸미고 나니 조금 기분이 좋아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안 되겠다. 산책을 해야겠다. 늦은 밤, 산책을 나간다.


밤산책.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할 때면 걸었다. 오늘은 별일이 없는대도 마음이 무거워져서 걷는다. 낮에는 무척이나 더웠는데 밤공기는 시원하다. 여름으로 가는 중인가 보다.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강변을 걸었다. 씩씩하게 걷지 못하고 터벅터벅 걷고 있는 내가 보인다. 드라마로 직접 보진 않았지만 염미정이 지하철에서인가 무표정한 얼굴로 지쳤어요, 하던 내레이션이 생각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지만 지쳤다던 염미정의 독백이 쓸쓸하게 들렸었는데 지금 내가 그렇다.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되고 계절은 흐르고 있지만 나는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음악을 들으며 천천히 걷는 깜깜한 산책길이 쓸쓸하다. 깜깜한 시골길에는 아무도 없다. 사람 하나 없는 길을 걷고 또 걸었다. 주자창을 지나고 공사장을 지나고 운동장을 지나고 공원을 지나고 저 멀리 조명이 화려한 다리가 보인다. 시골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하고 밝은 다리. 어쩐지 생경하다.


생각해 보면 계절이 변할 때면 나는 늘 앓았다. 몸이 아프다기보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지나간 계절을 그리워하고 다가올 계절을 두려워한다. 과거에 연연하고 미래를 불안해한다. 산다는 건 지치는 일이다. 지친 일상을 끌고서 터벅터벅 걸어가야 하는 일이다. 다들 어떻게 그런 생기와 활기를 갖고 살아가는 걸까. 버티는 삶은 참 재미가 없다. 다들 성큼성큼 잘만 달려가는데 나만 터벅터벅 간신히 따라 걷는다. 그저 천천히 걷는 삶이고 싶다. 뒤도 돌아보고 주변도 살펴보면서. 


매거진의 이전글 031. 여름으로 가는 길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