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와서 반성한다.
이혼을 두 번 한 여자가 생각하는 행복한 결혼생활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내가 독자라도 클릭했을 것 같다.
이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각종 미디어와 주변 사람들을 통해 ‘완벽한 배우자상’을 학습한다. 나 역시 그랬다.
비율이 완벽한 조각상처럼, 깎고 수정하고 덧붙여 머릿속에 그럴듯한 배우자를 만들어두었다.
배우자는 서로의 부모님에게 잘해야 하고, 살가워야 하며, 소득활동은 물론 가사까지 능숙하게 해내야 한다는 식의 틀을 나도 모르게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몇십 년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이 그 틀에 맞추려면 얼마나 피 나는 노력을 하며 자신을 깎아내야 할까.
전교 1등이 될 수 없는 사람에게 전교 1등을 기대하면, 실망과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전교 1등이 되지 못한 배우자 역시 낙심하게 되고, 결국 그 감정은 서로를 향한 화살이 된다.
“안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교 50등으로 만족하는 편이 덜 아프다.
또 한 가지 놓쳤던 사실이 있다. 배우자상은 나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상대방 역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 이혼을 앞둔 여자들] 오픈채팅을 운영하며 느낀 건, 이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다.
“제가 원했던 남자는 휴 잭맨이었는데, 알고 보니 조커였어요.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묻고 싶었다. “남자분이 원했던 건 스칼렛 요한슨이었을 텐데, 알고 보니 할리 퀸이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물론 반대의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누구나 머릿속 기대와 실제는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남녀 모두 해당되는 이야기다.
연애할 때 우리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자신을 숨긴다. 그래서 결혼 전에 충분히 나누지 못한 이야기들이 쌓인다.
상대 부모님에게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지, 경제적 부담은 어떻게 나눌 것인지, 가사는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
이런 것들은 미리, 그리고 솔직하게 조율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조율을 했더라도, 결국 내가 원하는 배우자상을 어느 정도는 포기해야 했다. 그 사람에게 나의 기준에 맞춰달라고 요구할수록 갈등은 커진다.
“왜 나를 통제하느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
관계는 이미 팽팽해진 뒤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배우자를 바꾸려고 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건 의외로 단순하다. 상대를 바꾸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대신, 내가 포기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초연해지는 일이고, 솔직히 말하면 인내에 가깝다.
“원래 저런 사람이구나.”
내가 경험한 결혼생활은, 사랑보다는 자신을 갈고닦는 수련에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그 수련이 부족했다.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어느 연예인이 “저는 남편 앞에서 방귀를 뀐 적이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는 ‘가족이라면 편하게 살아야지’ 하며 콧방귀를 뀌듯 넘겼다.
하지만 이혼을 겪고 난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결혼도 연애처럼 하는 편이 더 건강하지 않을까.
함께 공유할 생활이 있는 만큼, 각자의 생활도 필요하다.
나는 네가 되고, 네가 내가 되는 일심동체가 되는 것이 과연 행복일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자아가 생긴 이후 부모와도 수없이 싸우며 살아왔다.
각자의 자아를 가진 존재인 이상, 다른 사람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너와 내가 하나가 되려 할수록 갈등은 더 많이 생긴다.
생각해 보면 카페 사장님과 손님은 싸울 일이 없다. 관계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까울수록 다툼은 배가 된다. 나는 지난 결혼생활에서 너무 가깝게,
너무 많이 섞여 살았던 것 같다.
연애할 때처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옆집 사람을 대하듯 생각했더라면 그렇게까지 싸웠을까.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다.
“가족이 되었는데 무슨 남처럼 사느냐”라고.
그럴 때 나는 다시 묻고 싶다.
가족이라면, 정말 헤어질 수 없는 관계일까.
예전에 가족상담 강연에서 들은 말이 나의 가슴에 깊게 남았다.
“배우자와 가족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가족을 만들 수는 있다.”
배우자는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타인이다.
하지만 자녀와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며,
가정이라는 자녀를 만들고, 가정이라는 공동체를 함께 운영하는 동료가 될 수는 있다.
나는 이제 결혼을 그렇게 생각한다.
부부는 오래 함께 살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안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나는 8년을 연애한 사람도, 아이를 함께 낳고 키운 사람도 속을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30년을 함께 산 부부도, 회사에 가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지 않는가. 내 자식 속도 모른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이 생기면 우리는 쉽게 결론을 내린다.
“이 사람은 A라고 생각해서 B라고 말한 거야.”
나 역시 남편을 볼 때 늘 기본전제가 있었다.
“이 사람은 돈에 예민한 사람이야.”
“이 사람은 계산적인 사람이야.”
그 전제를 바탕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해석했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맞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의 의도와 생각은 내가 알 수 없었고, 지금도 모른다.
내가 그를 안다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보였다.
의문이 생기거나 오해가 들면, 추측하지 말고 묻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고,
몰라서 그렇다고 여길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는 것을.
나의 의도와 생각 역시 숨기지 말고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나의 의도를 오해하지 않게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일은 굉장히 어려웠다.
나는 모든 오해가 결국 설명의 부족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부부관계는 이 패턴이 습관처럼 반복되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한다.
남에게는 친절하게 설명하며 오해를 풀면서,
왜 배우자에게는 알아서 이해해 주길 바랐을까.
글을 쓰다 보니, 그게 나였는지, 상대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혼은 편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혼이 마음을 편하게 해도, 따뜻하고 존중받는 결혼생활만큼 값진 것은 없다.
나는 누구보다도 그런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고, 지금도 여전히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