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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란 Jan 20. 2024

[11월] 2.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될까요

#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안녕하세요. 늦은 점심을 잔뜩 먹고 돌아온 책방지기 정란입니다. 취사를 누르지 않고 밥을 기다린 덕에 정말로 늦은 점심이 되었습니다. 배는 조금 더 오래 고팠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기만 해서는 원하는 곳에 다다를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달았죠. 철학적인 시간을 가졌으니, 얼마간의 허기는 좋은 생각으로 채운 걸까요?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은 실수에서도 무언가는 배워야만 덜 허기지답니다. 가령 이런 거예요. 늦잠을 자느라 씻을 시간도 없이 병원에 가야 할 때. 덕분에 걱정하는 친구의 모닝콜로 깨어났으니, 내 정신은 없었으나 친구가 있음을 깨닫는 거죠. 버스를 놓쳐 올림픽대교를 도보로 건너야 할 때. 끝이 보이지 않는 직선 도로와 그 옆을 쌩쌩 내달리는 자동차들. 속이 비치지 않는 무거운 물살. 두렵고 아득한 와중에는 이런 걸 깨닫습니다.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안전하게 이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싶다. 나는 살고 싶구나. 그건 아주 귀한 깨달음이었어요. 그리고 생각은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죽음을 품고 이곳에 오는 이들은, 얼마나 무서웠던 걸까. 내가 보는 이 모든 것들이 두렵지 않을 만큼,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병원에 다다릅니다. 살고 싶은 이들이 아주 많은 곳으로요.


어제저녁, 책방하리에 관심을 갖고 응원하는 구독자 한 분으로부터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자신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고, 책방하리를 통해 하고 싶은 것들을 알려 주었고, 어김없이 책방하리를 응원해 줬어요. 짧지 않은 편지를 읽고 몇 가지 궁금증이 생겨 답장을 보냈죠. 번호를 단 질문은 네 개였지만, 실은 아홉 개의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MBTI였어요. 당신은 MBTI 성격유형검사를 해 보셨나요? 저는 대학생 때 대외활동을 하면서 종이로 검사를 했었고, 몇 년 전 MBTI가 유행할 때 인터넷으로 다시 했었어요. 건너온 시간만큼 결과는 달랐고요.


어제 그 손님의 성격유형이 궁금했던 건 왜일까요? 제 MBTI 유형의 특성에는 이런 게 있더군요. ‘질문의 정도가 애정의 정도이다’ 저의 경우에는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성가신 사람이 되기도 한답니다. 어쩐지 조금 슬프지 않나요? 좋아하는 만큼 질문할 수밖에 없는 나와, 그런 내가 조금 귀찮아지는 상대의 조합이 말이에요. 하지만 막상 슬픈 경험은 없답니다. 대체로 상대가 저를 조금 더 사랑해 주었거든요. 사랑의 크기가 비슷해질 즈음이면, 저는 그 사람에 대해 제법 많이 알게 된 이후였고요. 아무튼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할수록 그렇다고 느끼죠.


답장을 보내고, 다시 답장을 한 통 받고, 저는 또 답장을 보내고 잘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MBTI를 주제로 한 재미있는 책을 읽었답니다. 책방지기가 되어 정말 좋은 점이 뭔지 아시나요?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 종종 얼마간의 죄책감이 따라왔습니다. ‘나 지금 책 읽어도 되는 건가?’ ‘다른 걸 더 해야 하지 않나?’ 그러나 책방지기가 된 후로는 책을 읽을 때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답니다. 그게 제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으니까요. 『혹시 ****가 어떻게 ***?』는, 각 유형의 MBTI를 가진 이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단편소설을 모은 책입니다(일부러 안 가르쳐 드리는 거예요. 책방 와서 보고 사시라고!)(웃음). 저와 같은 성격유형인 영지가 나오는 소설도 재미있었지만,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INFJ인 온해가 등장하는 이야기였어요.


나는 MBTI가 뭔지 묻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를 궁금해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유튜브 쇼츠 보듯 지나가면서 짧게 파악하고 싶은 게 아닐까?


어제 그 구독자도 그렇게 느꼈을까 봐 흠칫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래도 나는 MBTI가 좋아.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라니 기특하고 귀엽잖아.


이왕이면 기특하고 귀엽게 생각해 준다면 좋겠습니다. 궁금한 것도 묻고 싶은 것도 너무 많지만, 그걸 다 묻다가는 밤새 24, 38, 42… 질문에 번호를 달아야 할지도 모르니까요. 이 책의 진짜 이야기는 제가 인용한 문장 바깥에 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과 나 사이의 진짜 이야기를 쌓고 싶어졌거든요. 시간을 두고 도토리를 모으듯이요.(여기서 ‘당신’은 이 편지를 받은 당신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책이 궁금하시다면 저에게 슬쩍 답장을 보내 주세요. 책방하리의 모든 책은 한 권씩만 입고되니까요.)


저는 ESFJ와 ISFP 사이에서 태어난 ENTP입니다. 동생은 ESTP고요. 제가 아주 오랫동안 사랑했던 연인은 ISTP입니다. 그 친구를 만날 당시의 제 MBTI는 ENFJ였고요.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ESFP입니다. 얼마 전에 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INFP. 그리고 제가 오래도록 믿고 좋아하는 친구도 INFP입니다. 일곱 개의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는 깨닫습니다. 그들과 나 사이에 MBTI 유형은 별 역할을 하지 못했음을요. 사실 거의 아무런 역할도요.


저는 깊고 넓은 마음을 가진 아버지와 도무지 알 수 없는 세계에서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조금씩 언니가 된 동생은 저보다 먼저 어른이 된 것도 같습니다. 저에게 사랑을 가르쳐 준 이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우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는, 제가 가장 싫어했던 것들을 모두 가진 사람입니다. 그 뒤편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가진 사람이고요. 얼마 전에 관계에 마침표를 찍은 이는 자신이 둥근 모양이라 했지만, 저는 그의 날카로운 면에 베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음 주, 사랑으로 저를 응원하는 다정한 친구를 만납니다. ‘짤랑’ 종소리와 함께요.


아, 저요? 최근에 저를 사랑하게 된 친구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버젓이 이 세상에 존재해 기어이 누군가 저를 사랑하게 만들죠. 놀랍도록 천재적이면서 믿을 수 없이 바보 같습니다. 속이 깊고 이타적이면서 누구보다 자신밖에 모릅니다. 사랑하는 이보다는 하루 늦게 죽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 견딜 수 없는 상실과 아픔을 주고 싶지 않거든요. 그의 마지막까지 내 손으로 잘 정리한 후, 머지않아 그의 곁으로 가고 싶습니다. 저는 철쭉더러 무궁화라고, 아니 아니 실수라고, 나팔꽃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한 치 앞을 모르면서 호언장담하는 사람이고, 몰랐던 한 치 앞에서도 꿋꿋이 갈 길을 찾는 사람입니다. 저는 ENTP이면서 ISFJ입니다. 그리고 LMNOP입니다. 무슨 소리냐고요? 안 알려드리겠다는 소리입니다. 진짜 저를 알아봐 달라는 부탁이랄까요.


저는 앞으로도 궁금한 이를 만나면 높은 확률로 물을 것 같습니다. “MBTI가 어떻게 되세요?” 그리고 상대가 대답하면 고개를 주억거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겠죠. “그렇군요. 저는 그것이 말해주지 않는 당신을 더 알아가고 싶습니다”


저는 친구 저녁에게 자주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오빠 너무 좋아!” 그럼 저녁은 열 번 중 한 번은 자신도 그렇다고 말하고, 아홉 번은 고장 난 TV처럼 지직거리는 소리를 냅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다가 문득 저녁에게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냅니다. ‘나는 오빠가 너무너무 좋아’ 그리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JONNA 좋은 것 같아!’ 저녁은 처음으로 이런 답장을 보냅니다. ‘이해가 확 되네’


담배를 피운다고, 욕을 한다고, 여자친구가 짧은 치마를 입어서 싸운 적이 있었다고 저녁과 친구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요. 제가 ‘존나’와 ‘~것 같아’를 써서 문장을 구사하는 일은 오래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존나’는 아주 상스러운 비속어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서 ‘~것 같다’를 붙이는 건 바보 같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존나 좋은 것을 존나 좋다고 말하고 나니 속이 시원합니다. 물론 두 번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요(웃음).


저는 이제 제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일들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당신과 저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나누게 될까요? 당신은 저에 대해 얼마나 더 알게 될까요? 저도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만, 답장이 올 때까지는 책장의 책처럼 얌전히 있을 생각입니다.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는 적당한 타이밍과 알맞은 속도가 필요한 법이니까요. 내일은 또 마흔 권의 책이 도착할 것입니다. 저녁이 선물한 정체불명의 블루투스 스피커도요. 그 안에서 당신과 쌓아갈 이야기들을 조금씩 길어내겠습니다.


당신의 MBTI가 무엇이든, 저는 당신에게 고맙습니다.

수요일과 토요일은 ‘편지, 하리’의 이야기가 쌓이는 시간입니다.

건강하고 밝은 얼굴로 일요일에 만나요.


-LMNOP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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