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독립서점 #책방하리 #편지하리 #펜팔
안녕하세요, 당신. 고작 하루를 만나지 못했을 뿐인데 그리웠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보내는 일이 어느덧 일상이 되었네요. 당신은 저의 일기장이고, 펜팔이고, 저를 응원해 주는 사람이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들어주는 좋은 벗입니다. 저는 당신의 하루치 행복을 챙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제 자그마한 이야기가 당신의 귓가에 머물며 작은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아주 늦은 시간에 잠이 들어 또 아주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습니다. 눈만 감으면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르는 밤과 새벽을 보내며 코를 풀기도 했습니다. 여섯 번째 편지부터는 저녁의 얘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으나(혹시나 이 인물이 편지에 등장하는 것이 지루하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참고하겠습니다.), 평화롭게 숨 쉬는 법을 잠시 잊은 어제 같은 날은, 저녁이 아니었다면 조금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끔 욕을 하므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했으나, 때로는 그가 대신 해 주는 욕이 저를 숨 쉬게 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는 쪽이긴 하지만 덕분에 웃기도 하고요. 제가 해 주었던 전생 이야기가 제 발목을 잡고 있긴 하지만, 그는 아주 좋은 친구임이 분명합니다. 영상통화를 하면서 담배를 피우기에 물었습니다.
“담배 피우면 스트레스도 좀 풀리고 그러니”
“그렇지”
“그럼 나도 담배를 피울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나는 술도 못 마시잖아”
“너는 안 마셔도 취할 수 있잖아”
“나도 어쩌면 담배랑 의외로 어울릴지도”
“애들 앞에서는 찬물도 못 마신다더니. 괜히 말했다. 내가 대신 피워줄 테니까 너는 잠이나 일찍 자”
여러 번 시도했으나 눈을 감는 것부터가 힘들었던 새벽. 저녁이 재밌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며 잠든 적이 많았기에, 특별히 재미없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더 빨리 잠들고 싶었거든요.
“그럼 나도 일기를 읽어줘야겠다. 일기장을 찾아서”
“싫어”
“어, 그래. 어 근데 이게 일기장인 줄 알았는데 노트네. 내가 지금까지 읽은 책 목록을 읽어줄게”
“오, 재밌겠다”
“좋아, 그럼. 네가 읽은 책이 나오면 얘기해 줘”
저녁은 읽었던 책 목록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일주일 안에 피아노 죽이게 치는 방법. 첫 목록부터가 저녁다웠고, 전혀 저답지는 않았습니다. 호텔 선인장. 이건 저도 읽었습니다. “요시모토 바나나”라고 외쳤더니 저녁이 “맞아”라고 대답한 후 말을 이었습니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인데 말이에요. 저는 오랜만에 경청하는 앵무새가 되어 저녁의 입에서 나오는 자음과 모음의 조합을 들었습니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사랑을 생각하다. 비둘기. 웃음이 터졌습니다.
“제목이 비둘기야?”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저녁은 말을 이었습니다. 일할 때는 휘파람을 부세요. 내가 사랑하는 시. 비틀즈 시집. 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마음이 예뻐지는 시. 앵무새 죽이기. 핵전쟁 우리의 미래는 사라지는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저는 99번 『개밥바라기 별』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건 비읍이 많이 들어가는 제목이네” 111번 『상실의 상속』을 들으면서는 이렇게요. “이건 시옷이 많네” 그러는 와중에 몇 가지 겹치는 목록이 있었습니다.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공중그네』,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사랑을 주세요』 같은 것들이요. 저녁은 한때 일본 소설을 즐겨 읽었고, 저는 대학시절에 일본 소설을 좋아하는 남자친구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연인’이라고 썼다가 지웠습니다. 아무래도 제 사랑은 지금까지는 한 명뿐이었거든요. 아무튼 그 친구가 좋아하는 것들을 탐독하던 시기가 있었으므로, 저녁과 겹치는 도서 목록은 그가 만들어 준 것이었습니다. 저녁과의 연결고리라도 만들어주고 갔으니 고마운 일이네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책 제목의 나열을 듣다가 말했습니다.
“평소에 재미있는 얘기해 달라고 할 땐 재미없게 잘만 하더니 재미없는 얘기해 달라니까 왜 이렇게 재밌는 걸 들고 와, 또?”
“재밌었어?”
“해 준 얘기 중에 제일 재밌었어”
“그만해야겠다. 독서 취향이 전혀 겹치지 않는 두 사람이 같이 읽은 책 찾기 놀이”
“이거 봐. 심지어 놀이 이름도 재밌어. 오늘 왜 이러는 거야”
생각하면 깜깜하고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기억들은 힘을 잃고, 점 같은 등을 보인 채 떠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은 제가 웃을 때마다 겁을 먹고 도망가는 모양입니다. 가장 사랑하는 소설, 프레드릭 배크만의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가 떠오릅니다. 이 책을 만난 이후로 이보다 더 사랑스럽고 완벽한 이야기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저에게 그렇다는 거니, 이의 제기는 나중에 책방에 와서 상냥하게 해 주세요.
산 위로 올라가자 공포가 동굴 속에서 일제히 뛰쳐나왔지만 기사들은 싸우지 않았다. 다른 전사들처럼 고함을 지르거나 욕을 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공포를 상대로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치를 취했다. 그것을 똑바로 쳐다보며 비웃은 것이다. 그것도 큰 소리로 당당하게. 그러자 공포는 하나씩 돌로 변했다.
저녁은 다양한 방법으로 저를 재우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얼마나 할 게 없었으면 생각하고 쥐어짜내서 갖고 온 게 그런 걸까 싶지. 더러운 새끼, 진짜” “그냥 할 일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생각하고 스트레스 받지 마. 그게 그런 새끼가 바라는 거 아니겠어? 너는 그냥 그 일을 어떻게 할지만 생각하면 돼. 할 일 목록에 올려놓고” “백두대간 수목원을 생각해 봐. 소나무 숲 사이로 지나가는 배를 생각해. 너는 선배드에 편안하게 누워서 그걸 보고 있어. 나도 여기 있으니까 무서워하지 마”
실은 저 무엇보다도 도움이 된 건 ‘독서 취향이 전혀 겹치지 않는 두 사람이 같이 읽은 책 찾기 놀이’였지만, 생각해 보니 무엇 하나 도움 되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오늘 그 기분 나쁜 것이 내게 온 것도, 어찌 보면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믿으며 매일 나를 더 사랑하는 어머니, 코뿔소이고 코끼리이며 기린이지만, 나를 위해서는 모든 가면을 벗고 호랑이가 되는 나의 아버지, 용감하고 씩씩하며 돈도 잘 버는 효진, 지금은 곁에 없으나 늘 곁에 있는 착한별과 하리쿠키, 존재함으로 아주 많은 것을 해내는 저녁. 그 모든 것이 내게 있으니,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여전하니, 나는 이미 충분히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재미있는 놀이 중에 파울로 코엘료의 『11분』이 나왔을 때, 앵무새가 오랜만에 입을 뗐습니다. “읽었어” 그러자 저녁이 묻습니다. “11분이 뭔지 알아?” “응. 섹스에 대한 책이었나” “맞아. 파울로 코엘료 소설이지. 그래서 11분이 무슨 뜻인지 알아?” “뭐였더라. 오르가슴이 지속되는 시간이었나” “사람들의 평균 섹스 시간” “그렇군. 그래서 오빠의 평균 시간은?” “글쎄, 시간을 재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시간을 재면서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 아! 나 그 소설에서 되게 좋아하는 부분이 있어. 자다가 롤러코스터에서 깨면 어떨 거 같냐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문장인데. 기다려 봐” 마침 2011년 일기장 맨 앞에 그 글을 붙여놓았던 것이 떠올랐고, 마침 그 일기장은 아직도 테이블 위에 있으니 손전등을 켰습니다.
잠이 들었다가 롤러코스터 안에서 갑자기 깨어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이 들까? 갇혔다는 기분이 들 것이고, 커브가 두려울 것이고, 거기서 내려 토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롤러코스터의 궤도가 내 운명이라는 확신, 신이 그 롤러코스터를 운전하고 있다는 확신만 가진다면, 악몽은 흥분으로 변할 것이다. 롤러코스터는 그냥 그것 자체, 종착지가 있는 안전하고 믿을 만한 놀이로 변할 것이다. 어쨌든 여행이 지속되는 동안은, 주변 경치를 바라보고 스릴을 즐기며 소리를 질러대야 하리라.
이 놀이의 화룡점정이었습니다. 지금의 란이에게 꼭 필요한 말. 롤러코스터는 그냥 그것 자체, 종착지가 있는 안전하고 믿을 만한 놀이인 것입니다. 한 바퀴 두 바퀴 돌고 나면 머리는 좀 헝클어지겠지만, 안전바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내려오면 저를 기다린 이들과 추로스를 먹으러 갈 수 있겠죠. 어머니는 벌써 추로스 가게를 찾고 있고, 아버지는 몸에도 안 좋은 그런 걸 왜 먹냐고 하지만 누구보다 맛있게 추로스를 먹고, 효진이는 이환이를 안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을 것입니다. 흠이는 그들과 아주 가까이에 서 있고요. 저녁은 기특하다며 제 머리를 쓰다듬을 것입니다. 그럼 저는 머리가 헝클어진 것도 개의치 않고 행복할 것입니다. 신이 저를 위해 (제 취향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롤러코스터를 운전했군요. 덕분에 저는 흔들리지 않는 땅의 소중함을 깨닫고 살아갈 테고요. 물론 이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은 저녁에게 여자친구가 생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말고는 안돼요. 그만큼은 괜찮은 친구인 것입니다.
영화 「30일」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정확하지는 않습니다). “좋은 기억보다 나쁜 기억이 많아지면 헤어지는 거래” 사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이 훨씬 많기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좋은 기억이 될 테니, 당신은 저의 좋은 기억이 되어 주세요. 아차, 이미 되어 주셨군요. 제 뒷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 우리 같이 향긋하고 달콤한 추로스를 먹으러 갈까요?
계획에 없던 추신.
오전에 저녁과 통화를 하던 중 저녁이 말했습니다.
“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거네”
“신기하다”
“뭐가?”
“나 편지에 그거 썼거든. 저녁은 읽었던 책 목록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 스포 해도 돼?”
“안돼”
“그래”
“오늘만 허락해 줄게”
제가 일곱 문장을 읽고 끝내자 저녁은 상냥하게 말했습니다. “그럼 하나 덧붙여주렴” 저는 싫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조금 조급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추신에 달아줘” “귀찮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나의 명예를 위해” “내가 오빠의 명예를 지켜줘야 하는 이유는?” “봐봐. 네 편지의 맥락으로 보면 나는 그 순간에 착각을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기억도 못 하면서 너의 말대로 받아주는 것 같잖아. 근데 어제 나는 정말 착각을 했던 거고, 나는 오늘 아침에 스스로 그 착각에서 깨어난 거지. 그 사실이 중요한 거야. 이 정도면 내 명예에 대한 명분이 충분하지 않니?” 저는 웃었습니다. 저녁이 진지하게 말하네요. “진짜야” 저는 또 웃습니다. 저녁은 말을 이어요.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맞았다고 하면 그건 쪽팔린 일이거든” 방금 그는 아주 쪽팔린 문장을 구사했습니다. ‘상대방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이런 중복 표현은 매력이 떨어집니다. 다급했던 모양이니 넘어가 줍니다.
“듣고 있니?” “응” “무튼 비슷한 일본 여자 작가들이 혼돈을 일으키긴 하지. 그리고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은 미치 앨봄인가 그랬던 것 같고”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응, 맞아. 그럴 거야” “이것도 틀려라”
제가 가끔 말이 없었던 것은, 조금 불필요하게 과장해 웃었던 것은, 키보드 소리가 내내 들렸던 것은, 저녁이 “듣고 있니?”라고 말하게 한 것은, 저녁의 명예 회복을 위해 통화 내용을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알까요. 명예보다 힘이 센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공백 포함 964자만큼의 명예를 회복하고, 저는 공백 포함 1072자만큼의 사랑을 담아 이 편지를 보냅니다. 너그러운 당신, 저에게 소중한 이의 명예를 지키는 일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