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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안의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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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R Jun 16. 2023

내안의 너 #4

엄마와 엄마

혹시 모를 유산 가능성을 대비해 가족에게 알리지 않고 보낸 한 달여가 흐르고, 회사 선배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엄마와 점심을 먹을 일이 생겼습니다. 아직 입덧에 시달리고 있을 때라 매운 걸 먹고 싶어서 집 근처 뼈다귀 해장국집으로 향했죠.


엄마는 아빠의 부재를 도저히 못 견뎌했습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초인적으로 발휘하고 있던 힘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였어요. 멍하니 아빠가 돌아가셨던 병원 앞 벤치에 혼자 앉아있다가 오신 적도 있었고요. 뜬금없이 전화가 와서는 막무가내로 당장 만나자고도 하셨죠. 퇴근길에 회사 앞에서 기다릴 테니 혹시 집에 같이 오면 안 되겠냐고 하신 적도 있습니다.


엄마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아는 저로서는 이런 변화가 슬픔을 넘어 비참했습니다. 죽음이 끝나지 않고 삶을 갉아먹는 기분이었어요. 돌아가신 지 1년 반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죠. 엄마는 말랐고, 늘 불안해했고, 혼자 있는 걸 두려워했습니다.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뼈다귀를 뜯다가 제가 말했습니다.

'내가 그래도 엄마 좋아하실 소식 하나는 가져왔어요'

'좋은 일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뭔데?'


'나 임신했어요'


그 순간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박수를 치더니 그야말로 화색이 돌았습니다. 세상에!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꿈에 너무나 예쁜 깻잎을 바구니째로 받았는데 그게 태몽이었네! 세상에 세상에, 이렇게 기쁠 수가 없다 너무나 잘 됐다, 하며 엄마는 뛸 듯이 기뻐했습니다. 아니 뭐가 그렇게 좋으신 거지? 싶을 정도로 생각보다 더 기뻐하셔서 놀랄 지경이었죠.


신혼 때부터 내심 아기 소식을 기다리신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고, 얼마나 기쁜 소식에 목말라 있었을까 싶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엄마는 너무나 힘이 난다며 수다스러워지셨고, 몸은 괜찮은지 물으며 그날 입고 간 결혼식 착장에 너는 이제 홀몸도 아닌데 구두가 너무 뾰족하다, 이젠 이렇게 무거운 가방을 들면 안 된다며 잔소리를 하고는 제 가방을 빼앗아 들고 앞서 걸었습니다.


아빠가 아프신 후로 제 도움을 필요로 했던, 아빠가 떠나신 후론 제 존재에 기대어 지내던, 그런 엄마는 갑자기 다시 보호자가 되었습니다. 순식간에 키가 큰 것처럼 보였고, 찻길에서 제가 엄마에게 늘 듯이, 반대로 저를 안쪽에 세우고 걸었습니다.


마음이 찡하고 덮어뒀던 눈물이 나려고 했어요.

아빠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콩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엄마에게는 조금 효도를 한 것 같았죠.


아직 성별도 알 수 없던 손주 덕분에 엄마는 다시 제 엄마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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