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 민음사

by 장소록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고통을, 무엇보다 고통을 원한다. 고통은 그들의 실존을 가장 강력하게 증명해 준다. 그리하여 그들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는 괴로워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만들어 낸다.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_ 슈테판 츠바이크)


이 소설은 가난한 중년의 하급관리 '마카르 제부스킨'과 가난하고 병약한 젊은 여성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 그 둘 사이에 오고 간 쉰다섯 통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페테르부르크 빈민가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두 사람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는 중에도 서로를 향한 다정한 마음으로 위안과 기쁨을 얻는다. 그러나 가난에 더해 병약함으로 고통받던 바르바라는 자신을 돕느라 제부스킨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자 부유한 시골 지주 브이코프와 결혼을 결정한다. 가난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짓누를 수 있는지,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굴절시킬 수 있는지를 작가는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정밀하게 묘사한다.


인물

물론 뛰어난 점도 없고 세련되지도 않고 품격도 없지만 나도 사람이라는 사실을, 나도 마음과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겁니다. (p162)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단순하지 않다. 바르바라는 빈궁한 제부스킨이 자신을 위해 돈을 쓰느라 처지가 더욱 궁핍해지자 속상해하고 마음 아파한다. 하지만 브이코프와의 결혼이 결정되자 혼수를 좀 더 화려하게 준비하기 위해 제부스킨에게 이런저런 뒤치다꺼리를 시킨다. '맑고 순수한 영혼'이라는 여성 주인공의 전형적인 일관성에서 벗어난,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인간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캐릭터이다.

제부스킨도 일반적인 하급관리의 모습에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 인물이다. 가난 탓에 때론 굴종적이고 단순한 일상을 살지만, 그는 책을 읽고 문학에 관심을 가지며 자존감을 지키려 애쓴다. 그는 처절한 가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슴이 움직이는 사람이다.


문장

지나간 모든 일들이 몹시 선명하게 눈앞에 떠오릅니다. 그런데 현재는 왜 이렇게 흐릿하고 깜깜할까요······! (p166)

9월 3일 바르바라의 편지(p162~p166)는 어린 시절 추억의 장면들을 묘사한다. 호숫가 풍경과 늦가을 정경과 추위가 스며든 아침 나절에 관한 문장들은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온다. 묘사된 장면의 구절구절이 섬세하고 아름다워 그 장면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리고 처참한 가난의 일상 속에서, 자연 속에 묻혀 걱정 없이 뛰놀던 어린시절을 그리워하는 바르바라의 마음에 공감하게 된다.


성장

어째서 어떤 사람에겐 태어나기 전부터 눈먼 행복이 예정되어 있고, 다른 이에겐 양육원에서 이 세상으로 곧장 나와야 하는 가혹한 삶이 준비되어 있을까요? (p170)

제부스킨은 풍요로운 거리 고로호바야를 걷다가 화려하게 차려입은 귀족부인들이 마차에 탄 모습을 본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바르바라가 그들보다 못한 게 없는데도 가난으로 고통스런 삶을 사는 모습을 떠올리며 세상의 불평등에 분노한다. 거리의 악사와 구걸하는 아이를 보며 가난에 대해 깊이 생각한다. 걸인 아이에게 아무 것도 줄 수 없었던 제부스킨은 가난으로 자식을 잃은 같은 건물의 세입자 고르시코프에게 자신의 전 재산에 해당하는 얼마간의 돈을 건넨다. 비록 자신이 빈털털이가 되었지만 진심으로 고르시코프를 동정하고 그의 불행에 가슴아파한다. '가난'에 대한 제부스킨의 문장들은 (스스로도 느끼듯) 문학적 빈곤에서 벗어난 그의 정신적 성장을 보여준다.


통찰

19세기 러시아의 시인이자 비평가인 마이코프는 고골과 도스토옙스키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고골과 도스토옙스키는 공히 현실 사회를 그린다. 그러나 고골은 무엇보다 사회적 시인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심리적 시인이다."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p227 _ 작품 해설 중에서)

작가는 제부스킨과 바르바라 외의 인물들의 모습도 섬세하게 그린다. 바르바라의 첫사랑 포크롭스키와 그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표현한 부분, 병으로 죽은 포크롭스키의 장례식 날 풍경, 어린 자식을 잃은 고르시코프의 불행과, 직장을 잃고 모든 것을 저당잡힌 채 굶주림을 겪고 있는 예멜리안 이바노비치의 모습 등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가난한 인간들의 제각각의 불행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사회 구조적 모순과 그로 인한 개인의 불행, 불행한 제각각 인간들의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의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작가는 사회와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