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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소록 Sep 25. 2024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김훈 장편소설  『남한산성』

"그해 겨울 추위는 땅 속 깊이 박혔고 공기 속에서 차가운 칼날이 번뜩였다." (p.36)   


『남한산성』, 김훈, 학고재


남한산성을 다시 읽는다.


북서풍처럼 닥쳐오는 청병을 피해, 품이 좁은 성에 웅크린 채 꺼져가는 조선의 시간. 끝은 기약이 없다. 적의 편으로 흐르는 시간 앞에 죽음은 예정된 일정이다. 불안은 공포로 자란다.


'화친은 곧 투항'이며 '싸우고 지켜서 회복할 길이 있을 것'이라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물러설 자리에서 물러서는 것이 사리'라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긴 언쟁은 '대의'와 '방편'에 혼란스러운 조선 조정의 현재를 잘 보여준다.  다만, 작가는 그 둘의 단심(丹心)만은 의심하지 않는다.



지금, 휴전의 땅에서 일상의 무게를 감당하는 자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무언가가 이 땅으로 닥쳐오는데, 닥쳐오는 주체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편협하고 무기력한 권력자들은 눈을 가리고 아귀다툼 중이다.  


청군의 용골대가 묻는다.

"저 안에 들어가서 대체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겐가?"


통역이 답한다.

"안에서 저희끼리 싸우고 있을 겁니다. 견디어야 하는 놈들끼리의 싸움일 테지요."(p75)


한반도의 남쪽에 갇힌 채 삶을 견디기 위해 우리도 이렇게 지금을 다투고 있는 걸까. 


어느 쪽도 변호하지 않는 작가의 시선처럼, 46일간의 치욕의 복판에 함께 선 누구도 선뜻 어느 한쪽으로 무게 중심을 옮겨놓기 어렵다. 치욕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도 전선에 서 있다. 지금, 내 삶의 무게 중심은 어느 쪽에 있을까. 여러 번 김훈의 문장을 되읽지 않을 수 없다.      


같은 시간을 살되 말로써 삶을 보이는 자들과 몸으로 삶을 드러내는 자들은 견디는 방식이 다르다. 말에 삶을 실은 자와 몸으로 삶을 드러내는 자, 최명길은 치욕을 글로 적고 성 안 백성 서날쇠는 고통을 망치질로 다스린다.


뜨거운 화덕 앞에서 망가진 병장기를 고치는 서날쇠의 대장간. 총이며 활이며 부러지고 녹슨 창검을 고치고 다듬는 대장간의 열기가 접전의 시작점이다. 휘어지고 비틀리고 빗나가는 것들을 바로잡지 않으면 어찌 격전의 현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랴. 그것은 말로써 아니 되고, 글로써도 아니 되며 오직 웃통을 벗고 두드려대는 망치질 속에서, 담금질 속에서만 가능하다. 서날쇠를 향한 작가의 애정이 각별한 까닭일 것이다.    

 

"무력하고 고집 세며 수줍고 꽉 막힌 나라의 아둔함" (p.260)      


누가 아둔함의 결과를 온몸으로 받는가.    

 

청은 조선인 포로를 부려서 조선행궁을 내려다볼 수 있는 봉우리인 망월봉 꼭대기로 통하는 길을 닦았다. 공사에 동원된 포로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죽었다. 청병은 조선 여인의 포대기를 뒤져 등에 매달린 아기를 빼앗아 언 강에 던진다. 언 강 위로 뗏목을 끄는 조선인 포로가 쓰러지면 떼어 내어 얼음이 깨진 물구덩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고, 돌연 죽음에 맞닥뜨린 성 밖의 백성들은 처참하다.  '무력하고 고집 세며 수줍고 꽉 막힌 나라의 아둔함'은 고스란히 백성들 몫으로 끼얹어졌다.      


김상헌은 성 안으로 함께 가자는 그의 청을 물리치고 집으로 돌아가고자 한 사공의 목을 벤다. 송파나루 유일의 사공인 그가 청병의 도강 안내를 맡을 것이기에. 살던 자리로 가겠다는 백성을 칼로 벤 김상헌이지만 그런 그가 끝내 기댄 곳은 묘당(의정부)의 누군가가 아닌, 성 안 백성 '서날쇠'였다. 그리고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잘 익은 거름을 밭에 내며 봄농사를 다시 시작하는 것도 서날쇠와 같은 백성이었다.      


죽은 사공의 아이 '나루'가 적의 숙영지를 통과해 성으로 들어온다. 김상헌은 나루를 서날쇠에게 보냈고, 서날쇠는 아이를 보살핀다. 나루가 초경을 맞고, 서날쇠는 나중에 있을 아들 쌍둥이 중 한 녀석과 나루의 혼인을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혼자 웃는 서날쇠의 얼굴에서 머무는 이야기의 끝맺음이 의미심장하다. 서날쇠의 웃음이 어쩌면 작가의 지나친 낙관주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떨치기 어렵다.    



임금이 아이에게 물었다.       
-송파강은 언제 녹느냐?      

-봄에……, 민들레꽃 필 때…….  (p176)   

      

우리의 오늘은, 다만 '당면한 일을 당면할 뿐'이다. 그리고 우리의 치욕을 덮어줄 삶의 영원성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봄에, 민들레꽃 필 때쯤, 언 강이 훌훌 풀리리라는 지순한 희망마저 놓아버릴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봄은, 참,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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