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리

발끝으로 서기

by 하린

나는 차가 없다. 긴 사다리도 없다. 높이 60cm 인 경량 3단 사다리가 있지만, 늘 들고 다닐 수는 없다. 버스에는 대체로 부피가 큰 가방과 사다리를 동시에 갖고 탈 수가 없고, 지하철은 가능하지만 역에서 먼 현장으로 가게 되면 그 또한 쉽지 않다. 나는 이런 내 상황이 민망하다. 사다리는 천장에 있는 물체를 다루는 작업자에게 필수적인 도구니까. 고객들도 내가 당연히 차를 갖고 오는 줄 안다. 그 차 안에는 사다리와 공구들이 실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차를 살 돈이 없다.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한다. 10만원 이상 되는 작업일 경우 택시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그 이하라면 현장에 있는 의자를 이용하는 수 밖에 없다. 문제의 출발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 의자들.


현관 센서등 하나를 교체하는 일이었다. 단가는 5만원. 나는 사전에 의자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현장으로 향했다. 어떤 의자인지는 묻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고객에게 의자의 높이가 얼마나 되는지 재어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보통 의자인지 바퀴가 달린 회전 의자인지도 꼬치꼬치 묻지 못했다. 알면 또 어쩔 것인가. 어떻게든 해보는 수 밖에 없었다.


도착한 원룸에는 회전의자가 두 개 있었다. 그 중 높아 보이는 것을 선택했다. 현관에 의자를 놓고 올라섰다. 흔들흔들. 발바닥이 아니라 발가락을 서 있는 듯한 느낌. 중심이 아니라 균형을 붙잡고 있는 상태. 팔을 위로 뻗어보니 손가락 끝이 닿는다. 발끝으로 서니 손가락 바닥이 닿는다. 내일은 종아리에 근육통이 있을 것이다. 괜찮다. 그보다는 회전의자에서 중심을 잡는 일이 더 중요하다. 이런 경우 보통 고객이 잡아주겠다고 나서지만 그 날 그 고객은 컴퓨터 앞에서 뭔가를 타이핑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타다다다닥 소리가 좁은 공간에 울려퍼지는 가운데 숨을 한번 길게 내쉰 뒤 드릴을 들고 타공을 하러 의자 위로 올라섰다. 드릴과 비트의 길이가 있으니 발끝으로 서지 않고도 가능한 작업이다. 물론 회전의자는 여전히 위태롭다. 균형감각이 좋은 편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앵커를 망치로 쳐서 박아넣을 때는 발끝으로 서야 했다. 한껏 뒤로 젖힌 목은 얼굴과 천장을 수평으로 놓이게 했다. 석고조각이 떨어져 눈 속으로 직행했다. 괜찮다. 좀 있으면 눈물과 함께 빠져나갈 것이다. 마지막 작업은 센서등을 한 손으로 천장에 고정시키고 다른 손으로는 나사를 조이는 일. 역시 쉽지 않다. 발끝으로 중심을 잡으며 고개를 젖히고 양손을 번쩍 들어올렸지만 여의치 않다. 5cm 가 부족하다. 나사가 구멍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한 번. 두 번. 허리가 아파왔다. 힘이 다 빠지기 전에, 고객의 의심이 깨어나기 전에 일을 마쳐야 한다. 집중을 하고 믿음을 가지려 노력하며 마지막 힘을 다 해 나사를 구멍 속으로 밀어넣고 돌렸다. 조여지는 느낌이 난다. 두번째 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팔이 덜덜 떨린다. 숨이 막힌다. 이럴 수록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성공. 헤드랜턴을 쓴 이마에서 땀이 떨어졌다. 안도감과 자괴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이게 이럴 일인가.


하지만 종종 벌어지는 일이다. 키만 조금 더 컸더라도, 아니 팔만 조금 더 길었더라도 웬만한 높이의 의자는 나에게 훌륭한 사다리가 되어 주었을테지만 부질 없는 불평이다. 내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최선을 방법을 찾을 수 밖에 없다. 단지 그것이 말처럼 우아하지는 않은 모양새를 갖고 있을 뿐. 이렇게 가끔 고전을 감내해야 하는 내 키는 165cm 이다. 살면서 내 키가 작다고 느껴진 적은 두번이다. 한 번은 클라이밍을 할 때. 그리고 또 한번은 조명 일을 하면서. 두 경우 모두 170cm 정도만 되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물론 부질 없는 희망이다.


언젠가는 차를 살 날이 올 지도 모른다. 사실 돈이 있었더라도 좁은 골목길에 주차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이고, 지하주차장 아닌 곳에 차를 두게 되면 관리가 너무도 어렵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에 망설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래도 차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내 자신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중 큼직한 덩어리 하나는 줄어들테니까. 올해는 운전면허증을 갱신해야 한다. 잊어버리지 않고 제 때 처리해두어야겠다. 차에 사다리를 실어두고 어떤 현장이든 마음 편하게 다닐 날을 상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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