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령> 서평
<계엄>
알베르 카뮈
녹색광선
2024년 12월 3일 밤, 대한민국에 계엄이 선포되었다가 철회된 그 비현실적인 밤으로부터 1년이 지났다. 그 시간을 통과한 뒤 2025년의 겨울에 다시 펼친 알베르 카뮈의 희곡 《계엄령》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책이 아니었다.
과거에 이 희곡을 읽었을 때, 나에게 카디스의 비극은 그저 잘 짜인 알레고리거나 흥미로운 문학적 비유에 불과했다. 독재와 공포 정치는 역사책 속에나 존재하는, 혹은 먼 타국의 이야기로서 나에게 '반면교사' 정도의 교훈을 줄 뿐이었다. 그러나 작년 12월의 그 밤을 겪고 난 뒤, 이 텍스트는 활자 밖으로 튀어 나와 나의 피부를 찌르는 직접적인 경고문이 되었다. '비상 상황'이라는 명분이 어떻게 일상의 언어를 지우고, 공포가 어떻게 구체적인 제도의 얼굴을 하게 되는지 뼈저리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스페인의 항구 도시 카디스에 혜성이 지나간 뒤, 군복을 입은 독재자 ‘페스트’가 등장하며 시작된다. 그는 무질서한 학살자가 아니다. 그는 기존의 통치자를 몰아내고, 지독할 정도로 체계적인 관료주의적 공포를 구축한다. 시민들은 장부에 기록되고, 생존 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며, 입을 다무는 대가로 생명을 연장받는다. 비서가 들고 다니는 명부에서 이름이 지워지면 사람은 즉시 죽는다. 이는 우리가 목격했던, 문서 한 장이 헌법적 질서를 정지시키고 시민의 자유를 옭아맸던 순간의 서늘함과 정확히 겹친다.
이 숨 막히는 체제 안에서 허무주의자 '나다'는 "세상은 원래 무의미하다"며 냉소하고 부역한다. 어쩌면 그는 행동하지 않고 조소만 보내는 방관자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카뮈는 결국 '디에고'라는 인물을 통해 반전을 꾀한다. 디에고는 깨닫는다. 독재자의 권능은 그 자신이 가진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그에게 바치는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것을.
나는 더 이상 당신이 두렵지 않아.
디에고의 이 선언이 터져 나오는 순간, 절대적이었던 페스트의 통제 시스템은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공포를 잃어버린 독재자는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 이 장면은 현실에서 1년 전 총 든 군인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국회로, 광장으로 모여들었던 시민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것은 공포지만, 그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것은 결국 각성한 개인의 용기다.
작품의 결말은 씁쓸하면서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시민들의 저항에 밀려 페스트는 물러가지만, 그는 "나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다"는 섬뜩한 경고를 남긴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자리에는 정의로운 세상 대신, 부패하고 무능했던 예전의 총독이 다시 돌아와 앉는다.
이 냉정한 결말 때문에 《계엄령》은 단순한 승리의 기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방심하는 순간, 공포의 시스템은 언제든, 어떤 얼굴을 하고서든 다시 '장부'를 들고 찾아올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서늘한 예언이, 이제는 너무나 선명하게 읽힌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카뮈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카뮈는 분명 독재를 경고하고 희망을 작품에 남겨 두었지만, 페스트의 대사는 그 희망만큼이나 날카롭고 절망적이어서 인상 깊었다. 가장 강렬한 경고문이 아닐까.
너희들의 소박한 기쁨 따위는 질색이야.
배불리 살 처지도 못 되면서 뻔뻔하게 자유를 요구하는이 나라를 생각하면 신물이 난다고.
내 손은 감옥도, 사형집행인들도 권력도, 피도 모조리 쥐고 있어!
이 도시는 곧 파괴될 것이다.
그 잔해 위에 건설된, 완벽한 사회가 아름답게 침묵하는 동안
마침내 도시의 역사는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것이다.
그러니 조용히 해라, 그렇지 않으면너희 모두 짓밟아 죽여 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