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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Dec 26. 2019

3차 십자군 이후 중동 정세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헤게모니 전쟁 그리고 몽골의 등장

 영국의 리처드 1세의 3차 십자군 원정 이후에도 총 5차례의 십자군 원정군이 조직되었는데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고 제 6차 십자군 원정군만이 총 사령관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술로 예루살렘을 잠시나마 점령하여 그나마 성공한 십자군 원정으로 간주할 수 있다.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이 아닌 베네치아 상인들의 권모술수로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인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성을 초토화시키는 어이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7차(1248~1249년), 8차 원정군(1270년)은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라는 십자군 원정의 대의명분과 상관없이 북아프리카 지역 이집트 및 튀니지를 공격하였다. 당시 이슬람 측 아이유브 왕조는 유럽의 기독교 세력이 주측이 된 십자군과 전쟁을 치르면서 성전이라는 이름으로 이슬람 지역의 헤게모니를 장악하여 지금의 이집트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대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십자군 원정군이 보기에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있는 예루살렘 점령보다는 실질적으로 아이유브 왕조의 군사 및 경제적 배후인 이집트를 점령하지 않고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자신들의 기독교 왕국을 계속적으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라딘 사후 이슬람 세계의 걸 세출의 영웅인 맘루크 4대 술탄 바이바르스가 7차, 8차 십자군을 격퇴하면서 8차에 이리는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 탈환이라는 결과물을 얻지 못하고 끝을 맺게 되었고 또한 리처드 1세의 3차 십자군 원정으로 세워진 십자군 왕국 및 공국이 차례로 이슬람 측 맘루크 군에게 함락되면서 서양 기독교 세력은 더 이상 1차 십자군 원정 이후로 세워진 기독교 십자군 왕국을 팔레스티나 지역에 세울 수 없었다.


 이 무렵 몽골제국은 칭기즈칸의 손자이면서 추후 러시아 지역에 킵차크 칸국을 세우는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여 1230년대 후반 러시아와 동유럽을 먼저 침략하기 시작하였고 1250년대에는 몽골 제국 4대 황제 몽케 칸에 의해 동생 훌라구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금의 중동 지역 전역을 침략하게 하세속적 권력은 없었으나 종교적 상징성만 존재했던 아바스 왕조를 무뜨려 수도인 바그다드를 초토화시켰다(1258년). 서양 기독교 사에 있어서 교황과 같은 역할을 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가 몽골에 침략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이슬람 세계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훌라구의 몽골군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바그다드에서 서쪽 지중해 지역인 팔레스티나 지역으로 진격해 시리아 북부 요충지인 알레포(*ISIS의 수도)와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를 차례로 함락시켰다. 이 때 몽골 제국의 길잡이 노릇을 한 세력이 십자군 및 중동 각 지역에 거주했던 기독교 세력이었다.

몽골군의 1차 유럽 침공 및 2차 중동 침공 진격로

 이는 당시 팔레스티나 지역의 대부분은 이슬람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으나 안티오크 공국 및 3차 십자군 원정으로 탄생한 아크레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 왕국이 여전히 국가로서 존재했기 때문에 몽골군을 활용한 반 이슬람 세력 동맹을 구축을 통해 성지 예루살렘을 재 탈환하고자 하고자 한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십자군 세력의 성지 예루살렘 탈환과 몽골 제국의 이집트로의 확장 전략은 맘루크 술탄국 4대 술탄 바이바르스에 좌절되고 만다. 바이바르스는 아이유브의 마지막 7대 술탄인 알 살라흐의 맘루크(*'노예'라는 의미지만 당시 맘루크는 주인-노예라는 단순 종속적인 노예라는 의미 이상의 지녔음)가 되었고 알 살라흐의 사병집단이나 마찬가지였던 술탄 친위부대인 바흐리 부대(*바다라는 의미로 이집트에서는 나일강을 바흐르라고 지칭한다)에 배치된 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바이바르스의 명성이 전 이슬람 세계에 떨치게 된 계기는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훌라구의 일칸국 몽골군과 기독교 세력 연합군을 폐퇴시킴으로써 팔레스티나 및 이집트를 몽골군의 침공으로부터 막아내고 마지막으로 남은 이슬람 세계를 수호한데서 비롯되었다.

말루크 술탄국의 팔레스티나 지배권 확보 : 아인 잘루트(Ain Jalut)전투(1260년)의 승리, 십자군왕국의 멸망(1291년)

 아인잘루트 전투가 발발할 무렵 당시 훌라구는 몽골 제국의 황위 계승 문제로 잠시 아이유브의 옛 시리아 지역을 비우고 있던 상황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이 오히려 바이바르스의 맘루크 군에게 예루살렘 왕국내에서 군사를 쉬게 하고 또한 자신들의 영토 통과를 허락하면서 몽골군의 진지를 우회하며 진격할 수 있었다. 당시 몽골군과 연합을 주도한 십자군 세력은 안티오크 공국이었고 아크레(지금의 텔아비브)십자군 왕국은 몽골족을 야만족으로 여겨 동맹에 소극적이었던 상황이었고 다소 중립적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 1260년 9월 양군은 드디어 아인잘루트 지역에서 마주쳤다. 바이바르스는 맘루크 군을 둘로 나눠 1군을 몽골군과 직접 상대하게 하였고 2군을 자신이 직접 지휘하여 몽골군 후방으로 돌아가 기습을 하여 몽골군을 섬멸하였다.

아인 잘루트 전투 전 몽골과 맘루크군의 진격로 : 예루살렘 왕국이 아크레성 통과를 맘루크군에게 허용하면서 맘루크군이 몽골군/기독교 연합 세력을 격파하는데 결정정인 공헌을 한다.  

 아인잘루트 전투의 승리는 여러가지로 이슬람 세계에 있어  의미있는 승리였다. 째, 바이바르스는 일약 제2의 살라딘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이슬람을 구한 영웅이 되었고 둘째, 몽골군 또한 아인잘루트 전투의 패배로 더 이상 시리아 이남으로 남하하지 못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기점으로 일 칸국과 경계를 확정하였으며 셋째, 정치적으로는 몽골군과 기독교 연합 세력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패퇴시킴으로써 사라센(중동) 지역에서 유일무이한 이슬람 왕조로서의 명맥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아인잘루트 전투 승리 후 권력에 대한 야망을 숨기지 않았던 바아바르스는 이슬람 세계 및 맘루크 친위부대인 바흐리 부대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시 맘루크 3대 술탄이었던 쿠투즈를 암살하고 4대 술탄으로 등극하였다.

중동 및 북아프리카를 향한 몽골군의 확장 전략은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사실상 좌절된다.

 몽골군의 침입으로 이슬람 세계가 초토화 되면서 자연스레 살아남은 맘루크 술탄은 유일한 이슬람 술탄국으로서 서쪽으로는 유럽의 십자군 세력을 상대해야 했고 동쪽으로는 일 칸국의 몽골군과도 계속적인 전쟁을 치뤄야 했다. 또한 여전히 자신의 제국 영토내에 기독교 십자군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트리폴리 백작령 포함)과 안티오크 공국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다. 그리고 일부 기독교 세력과 안티오크 공국을 포함한 일부 십자군 공국이 몽골군의 침입에 길잡이 노릇을 하면서 이들은 반드시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십자군 세력들은 동쪽의 일 칸국과 동쪽의 기독교 유럽 세력 그리고 북쪽으로는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맺은 상황이기 때문에 군사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십자군 왕국 멸망 이전 맘루크 술탄국 지배 영역과 십자군 왕국 지배 영역

 1268년 드디어 십자군 왕국 및 여러 십자군 공국을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영원히 쫓아낼 기회가 찾아왔다. 일 칸국의 1대 군주인 훌라구가 사망한 것이다. 훌라구의 죽음으로 일 칸국이 팔레스티나 지역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상황을 틈타 바이바르스는 군사를 일으켜 곧바로 북상하여 안티오크 공국을 멸망시켰다. 

1268년 안티오크 공국의 멸망( 지도 상 빨간색 표기 지역)


제 1차 십자군 전쟁으로 탄생한 안티오크 공국은 살라딘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던 시기에도 살아남아 200년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바이바르스의 침공으로 허무하게 멸망함으로써 서양 중세 유럽 세계에 크나큰 충격이었다.

 안티오크 공국의 멸망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으나 7차 십자군 원정 실패 후 프랑스에서 재기를 노리고 있었던 프랑스왕 루이 9세는 다시 제 8차 십자군을 결성을 한다. 그러나 정작 루이 9세는 전쟁중 병사하고 안티오크 공국 이후 유일하게 남아있던 아크레의 십자군 왕국이 멸망하는 결과를 맞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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