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시아에서 문명 탐험을 시작하다.
지난주에 나는 앞으로 글쓰기 방향에 대해서 잠깐 소개를 하였다. 앞으로 게재할 내 글은 언제 가는 실행할 세계일주를 대비하여 방문할 각 지역들에 대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그것의 역사적 의미를 고찰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투어로서의 세계 일주가 아닌 문명 탐험으로서의 세계 일주를 꿈꾸고 있는 나이기에 좀 더 준비된 세계 역사 연구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명 탐험을 실행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에 현재 내가 그 지역에 있지 않아도 마치 거기에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가능한 지도 자료를 최대한 활용하려 하며 이를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설명함에 있어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할 계획이다.
첫 번째 문명 탐험지로 나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중동의 화약고인 이스라엘 지역은 우리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기에 타 지역학에 비해서 지금까지 활발하지 못했던 게 현실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나조차도 이스라엘과 중동문제에 대해서 솔직히 관심이 손톱만큼도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요즘 나는 부쩍 이스라엘과 중동 간의 끊임없는 충돌의 원인에 대해서 궁금하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십자군 전쟁사를 강의를 통해 듣게 되었는데 정말 흥미로웠다. 이 글을 시작으로 나는 유대민족의 근원이자 팔레스타인의 정착지이기도 한 이스라엘 지역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왜 유대인과 아랍인은 반목할 수밖에 없는지 살펴볼 것이다. 직접 가보지는 못했으나 앞으로 가볼 계획을 가지고 있는 나이기에 관찰자가 아닌 여행자의 관점에서 글을 전개해나가고자 한다.
이스라엘과 중동 간에 분열의 씨앗이 잉태되다..
그때가 2006년도였을 것이다. 대학교 졸업이 다가오던 그해 겨울.. 나는 목표하던 바를 이루지 못한 나는 방황하던 차에 중국어를 배우고 싶어 무작정 중국으로 어학연수를 떠난 적이 있었다. 평일에는 어학연수기관에서 중국어 수업을 들었고 주말에는 평일에 못한 영어 공부를 해보고자 값싼 DVD 플레이어를 구매하여 불법으로 복제된 할리우드 영화 DVD를 사서는 숙소에서 영화를 보곤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반 거리에서 불법 복제된 DVD를 손쉽게 구매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바로 그때 보았던 영화들 중에 하나가 십자군 전쟁을 모티브로 한 올랜도 블럼 주연('발리 안'역) “Kingdom Of Heaven”이었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볼 당시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 배우들이 어떤 대사를 전달하는지 영문 자막을 보기 바빴다. 그 이후로 나는 케이블 영화 채널을 통해 일 년에 한 번씩은 “Kingdom Of Heaven”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볼 기회를 가졌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영화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서 궁금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영화는 예루살렘 왕국과 살라딘의 주도하에 기독교 세력을 소아시아 지역에서 몰아내려는 이슬람 연합 세력 간의 전쟁 신을 그야말로 장엄하고 웅대하게 그리고 다소 을씨년스럽게 느낄 정도로 묘사해낸다. 영화 한 장면 한 장면마다 깔리는 배경음악조차 엄숙하고 근엄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러 이슬람군의 공성 무기로 인해 예루살렘 성이 마침내 무너지고 예루살렘 성내 군인들(*실제로는 일반 백성들이다)과 이슬람 군인들이 무너진 성벽 위에서 서로에게 칼끝을 겨누며 한쪽은 이슬람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한쪽은 예루살렘 왕국으로 대표되는 기독교 세력을 예루살렘에서 몰아내기 위해 서로 간에 죽고 죽이는 살육전을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왜 두 세력은 죽고 죽이는 사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마지막으로 두 사람은 전장의 중앙에서 서로 만나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한 담판에 들어간다. 발리 안은 살라딘에게 성안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성 밖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살라딘에게 항복을 선언하였고 살라딘은 그의 요구를 수용한다. 발리 안은 만약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성안에 있는 모든 이슬람교도들을 죽이겠다는 무시무시한 말도 내뱉었기에 살라딘으로서는 발리 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담판이 끝나고 두 사람은 아래와 같이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넨다.
- Balian: "What is Jerusalem worth?" 예루살렘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 Saladin: "Nothing." (Walks away, then turns.) "Everything." 아무것도 아니요.. (걸어가다 돌아보며) 모든 것이기도 하지요..
그렇다. 예루살렘은 유대인에게도 이슬람인에게도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지만 그들의 전부일 수도 있는 그들에게는 유일무이한 성지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당시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소아시아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동쪽으로 페르시아 지역의 아바스 왕조를 무너뜨린 셀주크 투르크가 날로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소아시아 지역까지 세력권을 넓히게 되었고 결국 ‘만지케르트 전투(1071년)’를 통해서 이 지역은 결국 셀주크 투르크에게 지배권을 뺏기고 만다. 만지케르트 전투의 승리를 통해 투르크족은 유럽으로 진출할 수 있는 전초기지를 얻게 되었는데 지금의 터키인들에게도 크나큰 자부심을 느끼게 하는 역사적 사건인 듯하다. 자료 조사를 하면서 우연하게 만지케르트 전투와 관련된 기사를 찾게 되었는데 지난 3월 개장한 터키 최대의 이슬람 사원을 에르도안 대통령이 큰 애착을 보인다는 것과 그 사원의 첨탐 높이가 107.1m라는 점이 참으로 흥미로웠다. 눈치 빠른 분은 금방 눈치채셨겠지만 만지케르트 전투가 끝난 1071년과 첨탑의 높이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의 터키인들에게 만지케르트전투는 우리의 살수대첩 이나 한산도 대첩과 동일 선상의 역사적 사건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기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특별히 애착을 갖고 추진한 터키 최대 규모 이슬람 사원이 이스탄불 아시아 쪽에 문을 열었다. 이스탄불 위스퀴다르 구역에서 참르자 사원(터키어, 자미)이 6년간 공사를 마치고 7일(현지시간) 예배자들에게 개방됐다. 중앙 돔 높이가 72m에 이르고 한꺼번에 예배자 6만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참르자 사원은 터키 역대 최대 규모라고 관영 아나돌루 통신이 보도했다. 규모로는 이스탄불의 역사적 랜드마크인 술탄 아흐메트 자미, 즉 '블루모스크'나 북서부 에디르네에 있는, 건축가 미마르 시난의 걸작 셀 리미 예 자미를 압도한다. 사원 첨탑은 셀주크 튀르크 제국이 비잔틴제국을 물리치고 아나톨리아 반도를 차지한 만지케르트 전투가 벌어진 1071년을 기념해 107.1m 높이로 세워졌다고 통신은 설명했다.”
또한 이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깊은 돌산으로 피신해 거대한 지하 세계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터키 단체 여행 패키지로 꼭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카파도 피아’이다. 여행 다큐 프로그램이나 여행 예능 프로그램에서 많이 소개가 되었는데 마치 인간이 사는 지구가 아닌 마치 시공간 이동을 통해 우주로 떨어진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곳이다.
셀주크 투르크의 소아시아 점령으로 비잔틴제국의 황제는 이슬람 세력의 위협에 상당한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당시 사이가 좋지 못했던 로마 교황에게 구원을 손길을 뻗치고 만다. 정교가 철저히 분리되어 교황이 국왕 또는 황제와 동일한 권력과 권위를 인정한 중세 기독교 사회의 입장에서는 황제가 곧 교황이라는 그리스 정교의 정교 일원화 체제는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었고 이로 인해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 기독교 세력과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한 동장 정교 세력 간의 헤게모니 싸움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제국의 제국의 안위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한 나머지 자존심을 굽히고 로마-가톨릭 교황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당시 로마 교황인 우르바누스 2세는 교황권을 강화하고 로마-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로 분열된 동서교회를 통일하고자 프랑스 중부인 클레르몽에서 공회의를 개최하였고(이상 “클레르몽 공회의”) 이 회의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들로부터 되찾아오기 위해 다음 해 십자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로써 1차 십자군이 결성되었고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서 집결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의 니케아(Nicaea, 지금의 터키 iznik)로 상륙하여 니케 이성을 함락하고 만다.
위의 지도를 보면 1차 십자군의 원정로를 확인할 수 있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배로 이동 후 니케아에 상륙한 후 십자군은 니케아를 시작으로 에데사-안티오크-예루살렘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정복한 소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십자군은 아래 지도와 같이 안티오크 공국, 에데사 백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예루살렘 왕국으로 이어지는 십자군 공국, 십자군 왕국을 건설한다. 결과론적으로만 봐서는 1차 십자군 원정이 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실상 1차 십자군 원정은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은 사라지고 참전한 유력 영주들의 경제적 부를 성취하는데 이용당했을 뿐만 아니라 에데사, 안티오크를 정복하는 동안데 이슬람인들이 아닌 순수 기독교인들의 마을을 약탈함으로써 선의로 출발한 1차 십자군의 의미는 이미 초기부터 퇴색되고 말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출발할 당시 십자군의 규모는 대략 6~7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다만 당시 중세 유럽은 왕이 중심이 된 중앙집권의 전제국가가 아닌 각 지방 영주들이 왕과의 쌍무적 계약관계를 바탕으로 한 봉건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주요 구성원 또한 국왕이 아닌 유럽의 각 지역의 영주들이 자신들과 계약관계에 있는 기사와 사병들이 대부분이었고 이로 인해 지휘체계가 조직적으로 확립되어야 가능한 대규모의 대회전을 수행할 지휘관 부재로 인해 전쟁은 지루하리만큼 국지적인 소모전이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거시적 전략을 통해 전체 군대를 하나의 명령체계로 지휘하기보다는 각 영주들이 끌고 온 용맹한 말과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 계급을 통해 오직 힘으로만 상대방을 제압하는 단순 공격 방식을 고집하였기 때문에 십자군의 인명 피해도 클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군령이 제대로 먹히지도 않았기 때문에 탈영병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실상 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정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십자군의 전투력이 강해서가 아니라 셀주크 투르크의 내부의 분열과 당시 이스라엘 지역을 통치했던 시아파의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수니파 셀주크 투르크족의 견제로 인해 제대로 지원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1차 십자군에 의해서 정복되었다고 해서 끝난 게 끝난 게 아니었다. 이후 걸출한 아랍의 영웅인 살라딘이 출현하는데,, 살라딘으로 인해 예루살렘은 다시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