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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ctor Ha Oct 03. 2019

IS를 보면 십자군 전쟁이 보인다

모술에서의 살라딘과 IS 칼리프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

2편에서 1차 십자군 전쟁의 경과 및 결과를 살펴보았고 1차 십자군의 결과 십자군 왕국이 지중해 동부 연안지역을 따라 십자군 왕국, 공국, 백작령 국가가 세워졌음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이로 인해 살라딘이라는 걸출한 이슬람 세계의 영웅이 출현함을 암시하는 글로 2편의 글을 마무리지었다. 

나는 살라딘을 분석하기에 앞서 마호메트(무함마드)의 출현에서부터 살라딘이 출현할 때까지의 이슬람 세계가 어떻게 변화해 나왔는지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지도를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이슬람 세계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혈통이 아닐까 싶다. 혈통으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견원지간인 수니파와 시아파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632년 마호메트(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나고 움마(이슬람 공동체)에서는 칼리프를 선출해 마호메트의 뒤를 잇게 했다. 1대 아부 바크르, 2대 우마르, 3대 우스만 그리고 4대 알리가 마호메트와의 개인적 친분과 종교적 충성을 기초로 군사/행정의 수장이 되었고 하느님의 대리인임을 자임하였다. 1대 아부 바크르에서 4대 알리까지 이르는 시기를 흔히 정통 칼리프의 시대(632~661)라고 일컫는다. 당시의 아랍 세계는 마호메트 사후 이슬람을 강조하는 정책을 추구하는 예언자 마호메트의 메카 시절 동료들, 메디나의 마호메트 지지자들,  아라비아 통일전쟁에 메디나를 지원하였고 또한 정복전쟁에 참여했던 씨족들, 쿠라이시 부족, 우마이야 씨족 출신의 메카 귀족 등등 수많은 파벌들이 연합하여 제국을 이끌어가는 형국이었다. 다만 정통 칼리프 시대까지는 무슬림 공동체(*일명 움마라고도 함)와 이교도의 세계를 확고히 구분하고 아랍인을 지배자로 하는 아랍제국을 유지했다. 그러나 4대 칼리프인 알리 사후 3대 칼리프 우스만의 사촌이자 시리아 총독이었던 무아위야가 칼리프에 오르면서 우마이야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슬람 세계는 누가 칼리프직을 차지할 정당한 권리를 가졌는가라는 문제를 놓고 분열하게 되고 무아위야가 칼리프직에 오른 것과 그 후 칼리프직이 계승된 역사적 과정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는 종파인 수니파와 반면에 4대 정통 칼리프인 알리가 유일하게 적법한 칼리프이고 그의 후손만이 칼리프직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를 시아파로 분열된다. 7세기 중반의 이슬람 세계의 분열은 지금까지도 각 아랍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래 지도는 현재 기준 각 중동 지역 내 국가별 수니파(전제 무슬림의 약 90%)와 시아파(약 10%)의 분포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라크의 경우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할 때까지는 소수파인 수니파가 다수인 시아파를 지배하다 걸프전 이후 다수 시아파가 소수 수니파를 지배하는 형국으로 변화하였고 시리아의 경우는 알 아사드 정권으로 대변되는 소수 시아파가 다수 수니파를 지배하는 상황이다. 공교롭게도 2010년 튀니지로부터 촉발된 '아랍의 봄'이라는 전례 없는 혁명의 불길은 알제리, 바레인, 이집트, 리비아를 시작으로 시리아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소수 시아파인 알 아사드 정권을 타도하기 위한 수니파 계열 반군 세력이 시리아 북부 락카를 중심으로 봉기를 하였고 이어 ISIS가 다시 락카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 시기 즈음에 ISIS 세력은 급성장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아사드 정권 제거를 노리는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카타르 등 수니파 국가들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반 아사드 반군들에게 무기와 군자금을 지원하였고 당시 세력이 급성장하던 ISIS에 대부분의 무기와 군자금이 흘러갔다는 점이다. 또한 이라크의 경우 사담 후세인이 미국에 의해 축출된 후 총선거를 치렀고 시아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일부 수니파는 시아파 정권에 협력하였지만 ISIS와 같은 수니파 극단주의 반군 세력들은 시아파 정권에 반기를 들며 유전을 바탕으로 주변 국가들에게 원유를 밀수출하면서 막대한 군자금을 챙기게 되면서 서서히 시아파 이라크 정권을 압박하였고 2014년 이라크 서부 안바르주 대부분을 점렴하고는 6월 10일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을 함락하고 만다. 당시 국내 정치 상황도 ISIS에게는 큰 호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2013년 4월 이라크 정부군에 의해 키르쿠크 서남부의 하위자에서 평화시위를 벌이고 있던 수니파 주민들이 50명이 살해되고 110명을 부상당하고 수니파 지역인 서부 안바르 주의 팔루자와 라마디 등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주민 110만 명 중 50만 명이 다른 지역으로 도피하게 되면서 그때까지 시아파 주도 정부에 참여해 공존을 도모했던 수니파 주민이 ISIS의 준동에 암묵적인 지지를 보낸 것 또한 ISIS의 준동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아랍지역 내 수니파 분포도
아랍지역 내 시아파 분포도

2015년 국내의 한 언론사는 메인뉴스에서 IS의 대 서방 전쟁을 가리켜 "21세기 십자군 전쟁"이라고 표현하였다. 미국, 영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가 IS 격퇴를 위해 시리아 및 이라크 북부지역에 대한 합동 군사 작전을 진행함으로써 11세기 가톨릭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충동로 빚어진 십자군 전쟁이 반 IS 격퇴를 위해 서방세계가 한데 힘을 합침을 비유한 데서 이슬람대 반이슬람의 십자군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뉴스 장면 캡처 사진

마치 중세 유럽 사회에서 국가 관념이 다소 희미하긴 했지만 프랑스, 영국 및 독일이 국가 단위 또는 각 영주급 단위로 국적을 초월하여 오로지 십자군이라는 이름으로 예루살렘을 되찾고자 연합군을 조직한 것처럼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 현재의 강대국들이 힘을 모아 시리아 북부 ISIS 본거지인 락카를 공격한 것과 동일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다만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십자군의 목적은 성지 회복이었지만 지금 강대국들이 ISIS를 공격하는 것은 종교적 목적보다는 경제적 목적이 강한 것이 대조적이다.    


앞서에서도 언급했듯이 2014년은 중동 역사에 있어서 큰 역사적 의미가 있는 해이다. 수니파 이슬람 무장단체 이라크-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 : Islamic State Of Iraq and al-Sham) 또는 이라크-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 :  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가 6월 10일 이라크의 제2도 시인 모술을 장악하였고 6월 30일 모술의 누리 사원에서 ISIS의 지도자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자칭 칼리프로 칭함)는 이슬람 국가(IS)를 선포하였기 때문이다. 

모술은 아래 지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라크 북부에 위치한 도시로 살라딘(*살라흐 앗 딘 유수프 빈 아이유브)이 십자군 원정군과 일전을 치르기 전에 출정 연설을 했던 곳이기 하다. 

사실 지금에서야 시리아와 이라크로 국경이 나눠져 있지만 살라딘 치세에서는 레반트 지역 모두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 통치하에 놓여있었다. 살라딘은 이집트를 시작으로 해서 바로 레반트 지역까지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며 십자군과의 지속적인 전쟁을 도모하였고 또한 여러 부족으로 쪼개진 이슬람 사회의 통합을 이루고자 노력하였다. 

그에 반해 ISIS의 아부 바크르 바그다디는 소멸한 아랍인 중심의 정통 칼리파 국가의 부활과 이슬람에 의한 세계 정복을 명분으로 반인륜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그것을 지하드로 포장하였다. 그는 그만의 이 꿈꾸는 이슬람 세상을 위해 타 이슬람 세계를 철저히 파과하고 정복하였다. 12세기 가톨릭 세계와 대결하며 아바스 왕조 멸망 후 당시 분열되었던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고자 했던 살라딘이 지금 살아있다면 ISIS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참으로 궁금하다. 그래서였을까? 살라딘의 후손인 쿠르드족이 주축이 된 시리아 민주군(SDF)에 의해 소멸되는 운명을 맞고 마는데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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