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가 이끄는 3차 십자군은 아크레성(Acre)을 함락한 뒤 지체 없이 아르수프(Arsuf)로 진격하였다. 아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3차 십자군은 아크레성 탈환 후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먼저 해안을 따라 해안 도시를 차례로 함락하는데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예루살렘성을 탈환해도 후방 보급로가 확보되지 않으면 살라딘이 대규모 병력을 끌어모아 다시 예루살렘성을 공격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시간이 다소 지체되더라도 해안 도시를 먼저 점령하여 바다 및 육지를 통한 보급로를 먼저 확보한 후 예루살렘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점선내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이 탈환한 영토 범위
아크레를 출발한 3차 십자군은 행군 간에 살라딘의 이슬람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전위, 중앙, 후위의 역할을 철저히 구분하여 각자의 임무에 맞춰서 방어에 알맞게 부대를 편성하여 진격을 하였는데 전위는 자신이 데려온 영국군이, 후위는 필립 2세가 남기고 간 프랑스군이 중앙은 예루살렘 왕국 군대, 템플 기사단, 성전 기사단 및 현지 유력 영주들의 군대 및 리처드의 프랑스령 푸아티에 군대가 혼성된 부대를 배치되었고 중앙군의 경우 3열 종대로 좌우는 기병을 중앙에는 보병 부대를 편성하여 기병이 보병을 호위하게 하였고 좌우 기병은 살라딘 군의 공격을 진군 방향 기준에서 좌측 기병부대가 주로 상대해야 했기에 하루마다 좌우를 바꿔주면서 효율적으로 살라딘 군의 공격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또한 해안가를 따라 보급선도 육지의 십자군의 진격 속도와 보폭을 같이 맞추면서 함께 이동하였는데 전투가 계속되면서도 이 보급선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군량미 보급은 물론이거니와 부상병 운반 및 이슬람 해군의 접근을 사전에 봉쇄함으로써 리처드의 십자군이 굶지 않고 체력을 비축하면서 오롯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이미 지난 회차에서도 언급을 하였지만 십자군 진영의 해군은 대부분 이탈리아 해군 출신으로 편성이 되어있었는데 이탈리아 제노바 및 피사 해군의 탁월한 접안 능력으로 인해 육지의 십자군에게 원활하게식량을 공급할 수 있었는데 영국 해군의 경우 이와 같은 접안 능력이 없었기에 리처드는 자신의 직속부대인 영국 해군이 아닌 이탈리아 해군에 보급선 운영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Charles Oman, A History of the Art of War. The Middle Ages from Fourth to Fourteenth Century. 1898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5만의 살라딘 군을 넓은 평원에서 자신의 2만 군사로 상대하기는 수적으로 열세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부대 편성을 통해 좌측, 후방 쪽 방어만 집중토록 하여 살라딘의 대군을 상대하도록 하였고 또한 아르수프를 우선 탈환하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에 굳이 행군 간에 살라딘 군과의 전면전을 일으킬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러한 행군 방식은 우측에서 해군의 병참선들이 시의적절하게 보급품을 전달해주어야 한다는 것, 좌측의 전선은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없는 사막 또는 평야지대여야 시야를 확보하여 최대한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문제는 아르수프에 도착하기 전 사막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숲이 있었다는 것이다. 살라딘 군은 그때까지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을 자신들이 의도한 대로 평야 지대로 유인하여 대회전을 치르려고 했던 계획이 계속 수포로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3차 십자군이 이 숲을 지날 갈 때 기습 작전을 감행하고자 하였으나 리처드 또한 이런 살라딘 계획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전군에 살라딘 군의 기습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1191년 9월 초 그때까지 살라딘 군은 리처드가 어떻게 나올지 지켜만 봐왔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병을 통해 3차 십자군을 유인하는 소규모 국지전만을 치르고 있었는데 십자군이 아르수프에 도착하기 전 수목이 우거지 숲지대를 지나가는 아침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먼저 살라딘은 기병 수천을 보내 3차 십자군의 후미를 우선 기습하였다. 당시 성전기사단이 후미의 방어를 맡고 있었는데 처음에는 방어에만 집중하였으나 아군의 피해가 극심한 나머지 후미를 맡고 있었던 성전 기사단의 단장은 아군의 피해를 참지 못하고 계획된 진격로를 이탈하여 살라딘 군을 역공하기 시작했다. 당초 리처드가 의도했던 행군 진영이 성전기사단에 의해 갑자기 깨지면서 리처드는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직속부대를 이끌고 전방에서 후미로 말머리를 돌리고는 후미의 성전기사단을 구하기 위해 살라딘의 이슬람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아르수프 전투 상황도
아르수프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전투는 대규모 전투 양상으로 변해버렸다. 아르수프성을 탈환하기 위한 공성전을 준비하고 있던 리처드의 입장에서는 예정에도 없는 전투를 치러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다만 Lionheart 리처드는 3차 십자군의 총대장으로서의 용기와 리더십을 지니고 있었다. 계획하지 않은 전투였으나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버린 상황에서 리처드는 과감하게 적진 깊숙이 기병을 이끌고 들어가 이슬람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전투는 살라딘이 원했던 수적 우위를 바탕으로 한 전면전이 되었기에 이슬람군에게는 기회일 수도 있었으나 오히려 리처드를 중심으로 한 철갑으로 무장한 십자군 기사단이 이슬람군을 일방적으로 살육하였고 결국 숲으로 다시 패퇴를 하고 말았다. 다만 리처드는 숲 속에 살라딘이 매복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숲 속 깊숙이 따라가지 않고는 군사를 다시 정비하여 아르수프성으로 향하였다.
Battle Of Arsuf, Richard The Lionheart is a painting by Eloi Firmin Feron
리처드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아르수프의 이슬람군은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는 성을 비운 상태였고 리처드는 힘들 것이라 예상했던 아르수프 공성전을 치르지 않고 무혈입성하게 되었다.
리처드가 등장하기 전 이집트,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아이유브 왕조 술탄으로 카톨릭 세력에 대항하며 성전의 영웅으로 칭송받던 살라딘이라는 존재는 아르수프 전투의 패배로 말미암아 이슬람 세력에게 있어서 불패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계기로 살라딘이 정점이 되고 각 이슬람 봉건 영주들이 합심하여 카톨릭 세력을 몰아내고자 한 지하드(성전)라는 의미는 조금씩 빛이 바래게 되었다. 이슬람 봉건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살라딘이 군사를 요청하면 당연히 전쟁에서의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당연히 성전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군사를 파병하였으나 리처드의 3차 십자군이 살라딘의 이슬람군을 계속해서 격파하면서 살라딘에 대한 믿음이 조금씩 깨지게 되면서 추가 파병을 주저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살라딘은 믿을 만한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이유브 왕조의 주요 거점인 이집트 지역은 여전히 비옥한 토지로 인해 충분한 식량을 보급할 수 있었고 필요할 경우 이집트군을 동원하여 3차 십자군을 상대할 요량이었다.
리처드는 며칠간의 휴식을 통해 군사들을 최대한 쉬게 한 다음 지체없이 다시 야파(Jaffa)로 진격을 서두른다.
지중해-텔아바브 해상루트는 중세 유럽인들이 성지로 가는 가장 안전한 루트였다.
참고로 야파는 지금의 이스라엘 텔아바브이다. 2017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하기 전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텔아바브는 지금이나 예전이나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에 있는 해안도시이다. 예전의 카톨릭 교도들은 터키, 레바논, 시리아를 통한 성지 순례 루트 외에도 야파(Jaffa, 텔아바브)까지 배를 타고 와서는 성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다고 한다.
야파는 십자군이 공격을 해올 것을 대비하여 예루살렘 인접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있었던 살라딘의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기에 리처드는 어려움 없이 야파성에 진입을 할 수 있었다.
야파 다음은 드디어 예루살렘 성... 그러나 리처드의 앞길에 또 하나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자신의 잉글랜드 왕국이 프랑스 필립 2세의 침략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미 3차 십자군을 출병시키기 전에 양국이 협정을 맺어 십자군 전쟁을 종료할 때까지 양국 간에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협정을 맺었음에도 필립 2세는 리처드의 영지인 노르망디, 아키텐 지역을 침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