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홀 10년의 이야기
4. 블루홀은 어떻게 배틀그라운드 같은 게임을 만들 수 있었을까?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을 이야기하면서 빠트릴 수 없는 이야기 중의 하나가 개발사인 블루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동안 한국 게임 개발사들이 해외에서 성공을 거둔 경우는 굉장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중국을 제외하면 어디까지나 해외의 니치마켓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지,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성공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그 전까지는 비를 월드스타라 부르고 있었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나오고 나서야 진짜 글로벌 성공이 뭔지를 보여준 느낌이라 할까요?
지금 배틀그라운드의 위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니치마켓이 아닌 전세계의 메이저 게이머층에서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한국 개발사의 게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더 뿌듯한 이유는 10년전에 블루홀이라는 회사가 설립된 이유가 바로 지금처럼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블루홀은 2007년 3월 현 블루홀 장병규 이사회 의장의 주도로 엔씨소트프트 출신의 MMORPG 개발자들과 네오위즈 출신의 경영 및 사업팀이 의기투합하여 설립된 회사입니다.
설립초기에 리니지3 개발팀의 집단 이직 문제로 엔씨소프트와의 법적 분쟁에 휘말려 위기를 겪긴 했지만, 7년에 걸친 송사끝에 결국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블루홀이 신생회사라 엔씨소프트와의 여론전에서 불리한 상황을 겪을 수 밖에 없어서 여러가지 왜곡된 뉴스들이 돌아다녔지만, 정말 개발자들이 소스코드 한 줄이라도 들고 나갔었다면 바로 회사 문 닫아야 했을 겁니다. 그당시 상황을 떠올리면 참 하고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다 지나간 일이니 그건 묻어두기로 하고…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멤버들의 구심점이 되어주었던 것은, 전세계 게임시장에 통할 수 있는 플래그쉽 MMORPG를 만들겠다는 비전이었습니다. 그당시 장병규 의장이 내세웠던 기치는 서양권 시장에서의 성공이었습니다. 한국 온라인 게임이 한국을 벗어나 세계시장에서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데, 일본에서 성공한 라그나로크, 중국에서 성공한 미르의전설처럼 (이땐 2007년이라 아직 크로스파이어가 중국에서 성공하기 이전입니다.) 아시아 시장에서는 한국 게임들이 잘 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북미유럽에서 제대로 성공한 한국 온라인 게임은 없다. 우리가 그 최초가 되어 진정한 글로벌 성공을 이루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걸 사대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글로벌 성공이란 평가도 미국중심으로 형성된 영어문화권에서 인정받지 못하면 좀 퇴색되는 게 사실이죠. 싸이도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다시 미국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국가들로 퍼져나가 전세계 성공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인터넷이나, 영화, 팝 뮤직 등에서 미국 시장의 힘은 강력하고, 여기가 문화 컨텐츠의 메이저리그이기 때문에 북미시장에서 성공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블루홀은 이런 목표를 가지고 설립된 회사인만큼, 초기부터 미국 시장 진출을 위해 적극 투자합니다. 어느정도였냐 하면 미국 퍼블리셔를 끼지 않고 직접 서비스를 하기 위해서 미국 지사를 세우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많이 무모한) 결정을 내릴 정도로 말이죠. En Masse Entertainment (앤메스 엔터테인먼트라고 읽습니다. 줄여서 EME)를 미국 시애틀에 설립하고, 테라 개발비의 절반 정도 금액을 추가 투자해 현지 서비스를 위해 쏟아붓습니다. 그냥 미국이 한국에 비해 인건비를 비롯해 모든 게 비싸기 때문에 돈이 많이 들어간 겁니다.
재무적으로 보면 미국 시장에 대한 투자는 그렇게 현명한 결정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래도 이런 경험을 통해서 회사 멤버들 특히 경영진에게 쌓이게 된 정보와 글로벌 감각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의 배틀그라운드 성공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예 프로젝트가 시작조차 되지 못했을 수도 있겠죠.
블루홀은 테라의 런칭이후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처음 창업했을 때의 장미빛 전망과는 다른 차가운 현실이 닥쳐옵니다. 처음 기대했던 수준에 못미친 불완전한 상태로 출시할 수 밖에 없었던 테라. 월정액 MMORPG 게임 시장의 축소와 Free To Play (부분유료화) 게임들의 성장이 가져온 급격한 환경 변화. 비전을 잃은 개발자들은 하나 둘 떠나가고, 마지막 희망이었던 미국 시장에서마저도 참패를 하며 회사는 큰 위기에 빠집니다.
하지만 블루홀은 위기를 기회로 바꿔 테라를 Free To Play 게임으로 변화시켜 시장에 재런칭 함으로써 화려하게 부활에 성공합니다. 이게 사실 말은 쉽지 얼마나 어려운 일이냐면, 애초에 경주용 스포츠카로 설계된 차를 운반용 트럭으로 개조시키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입니다. 뭐 덕분에 스포츠카 엔진을 장착한 슈퍼트럭이 만들어져서 테라는 서양권에서 World of Warcraft 다음으로 가장 성공한 MMORPG로 자리잡게 됩니다.
이때 테라가 스팀에도 서비스를 하게 되는데, 스팀 MMORPG 차트 1위를 기록하며 쏠쏠한 수입을 거두게 됩니다. 이때의 경험이 배틀그라운드 스팀 얼리 억세스 출시라는 한국 개발사들이 상상하기도 힘든 방법의 런칭을 경영진이 승인하게 되는 계기로 동작하지 않았나 추측해 봅니다.
이런 행복했던 시절도 잠시, 게임시장의 거대한 흐름이 모바일로 옮겨가면서 PC 게임이 주력이었던 블루홀에 다시 위기가 찾아옵니다. 그간 살아남기에도 힘겨워서 제대로 모바일 게임 개발에 투자를 할 여력이 없었던거죠. 여기서 투자란 단지 재무적인 투자뿐 아니라, 개발자등의 인적자원까지도 포함합니다. PC게임과 모바일 게임은 개발 방식이 많이 달라서 축구선수에게 갑자기 야구경기 시킬 수 없는 거랑 비슷하거든요. 꽤 긴 시간의 적응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데, 기존 개발자들이 적응하기를 기다리다간 회사가 망하게 될지도 모르고, 게다가 Free To play 변환 이후 의욕적으로 시도했던 중국 진출의 실패로 인해 블루홀은 더더욱 힘들어 집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블루홀의 김강석 대표는 회사의 체질변화를 도모하는 큰 전략적 결정을 내립니다. 그건 개발사로서의 정체성에는 변화를 주지 않으나, 함께 글로벌 성공이라는 비전을 공유할 수 있는 회사들과 주식교환을 통해 개발팀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하고 어려운 결정이냐하면, 보통 회사가 어려운 상황이 닥치면 경영자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구조조정입니다. 즉 개발팀의 축소이죠. 그리고 당장 현금을 돌릴 수 있는 사업으로의 진출. 게임회사의 경우는 주로 퍼블리싱이 되겠네요. 하지만 블루홀은 그 길을 가지 않고 오히려 적자 확대를 감수하고 개발팀을 늘리는 결정을 합니다. 그때 합병한 회사 중 하나가 지노게임스였고, 지노게임스의 김창한 PD가 합병 이후 지금의 배틀그라운드를 만들었으니, 정말 신의 한 수가 된거죠.
지금와서 이렇게 돌아보니까 그게 신의 한수로 보이는 거지, 그 합병을 통해 회사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고 그 과정에서 불만을 품고 퇴사한 개발자들도 많습니다. 아직도 하나의 회사로 융합하는 일은 여전히 진행중이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블루홀의 현안 중 하나입니다. 배틀그라운드의 성공이 있었으니 결과적으로 훌륭한 전략이었다고 나중에야 평가할 수 있는 것이지, 오히려 이런 잘못된 전략때문에 회사가 망했다는 스토리로 흐르기 딱 좋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때 합병의 주 대상이었던 회사들은 대부분 모바일 게임 회사였습니다. 지노게임즈도 '데빌리언 모바일' 타이틀에 더 기대를 갖고 진행했던 합병이었기 때문에, 솔직히 지금의 배틀그라운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진행했던 의사결정이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거에요. 혹자는 결국 얻어 걸린 거 아니냐라고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미시적으로는 우연이나, 거시적으로는 필연의 결과."
배틀그라운드의 개발과정 이야기를 들어보면 블루홀 사내에서도 의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국내 퍼블리셔들에게 보여줬을 때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배틀그라운드의 지금과 같은 대성공은 여러가지 퍼즐조각들이 맞춰지며 탄생하게 된 우연의 결과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블루홀이라는 회사가 창립초기때부터 추구해 온 방향과 역사를 보면, 마치 지금의 배틀그라운드 성공을 위해서 하나씩 준비해 온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회사의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흔들리지 않고, 글로벌 시장 특히 서양권 게임 시장에서 성공을 거둔다는 목표를 향해 지난 10년동안 묵묵히 걸어갔기 때문에 지금의 결과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올바른 비전을 가지고 올바른 방법으로 포기하지 않고 일을 추진하다보면 한두번 실패를 겪을 지 몰라도, 언젠가는 원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블루홀이라는 회사가 경영진의 교체없이 계속 지금과 같은 길을 걸어갔다면, 이번 배틀그라운드는 아니었을 지 몰라도 또 다른 게임으로 언젠가 지금과 같은 글로벌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거라 믿습니다.
우리는 한국에 살다보니 주로 한국 시장의 뉴스나 사용자들의 반응만을 접하기 때문에, 해외의 게임 뉴스나 평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잘 모를 수 밖에 없는데, 지금 블루홀에 대한 해외 게이머들의 평가는 한국과 크게 다릅니다. 한국에서는 블루홀이 테라라는 대작을 만든 대형 개발사이지만, 해외 게이머나 게임미디어들의 눈에 블루홀은 변방의 작은 회사일 뿐입니다. 마치 우리가 ‘클래쉬 오브 클랜’의 개발사 슈퍼셀을 바라볼 때, ‘아니 핀란드에서도 이런 훌륭한 개발사가 있었어?'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요?
그런 회사가 테라 같은 독특한 게임성을 가진 게임을 만들어 MMORPG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더니, 이번에는 배틀그라운드 같은 신선한 게임으로 연달아 성공을 거두어 '온라인 게임 개발에는 뭔가가 있는', 그런 특별한 회사로써 인식되고 있습니다. 뭐 별로 안 유명한 회사의 안좋은 뉴스가 해외에까지 퍼지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좋은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는 뉴스들만 접하니까 그렇게 된 거라고 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평가는 굉장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블루홀이라는 개발사의 긍정적인 브랜드가 해외 게이머들에게 형성되고 있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마블 영화 한 두편은 좀 흥행에 실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블 유니버스 아래서 어벤져스 캐릭터들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우리는 늘 기대를 하고 새 영화가 나오면 그 영화를 보기위해서 극장을 찾습니다.
블루홀은 그 높은 문화적 장벽을 뚫고 이제까지 한국의 어떤 개발사도 해내지 못했던, 북미 게임 시장에서의 괄목할만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입니다. 배틀그라운드의 인기는 언젠가 식을 지 몰라도, 블루홀이 앞으로도 지금과 같은 철학으로 계속 게임을 만든다면 전세계의 게이머들이 블루홀이라는 회사를 사랑하고, 새로 나오는 게임들도 지금처럼 애정을 갖고 즐겁게 플레이 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이게 제가 블루홀의 미래에 대해서 희망적인 시선을 가지고 바라보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배틀그라운드라는 단기적인 성과를 보고 블루홀의 투자에 관심가지시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이런 훌륭한 게임 개발사가 대한민국에도 있으니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블루홀에 대한 투자를 검토해 보라고, 제 주변의 투자에 관심있는 분들께 이야기 해드리고 싶네요.
그동안 주저리주저리 써 내려간 긴 글을 모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