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성장통을 겪고 있습니다.

아직 배워야 할 게 많네요.

by 하로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지 벌써 4개월이 지났습니다. 3개월이라는 수습 기간을 무사히 넘겼다는 안도감도 잠시, 요즘 제 마음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 경력의 대부분은 스타트업(또는 이를 베이스로 삼은 중견기업)인데, 약 30년이 된 중견기업으로 옮기면서, '내가 여기서 잘하고 있는 게 맞나?'라는 고민에 자주 하고 있습니다.



1. 지금까지 제품 전략을 짰다는 착각



이력서에 '제품 전략 설계'라는 말을 참 많이도 썼습니다. 나름대로 시장을 분석하고 로드맵을 그려왔지만, 이곳에서 2026년 제품 전략을 마주하며 아치 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전략'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은 사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의 나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야심 차게 준비한 전략 안이 CPO님께 번번이 거절당하고, 제미나이나 GPT를 붙잡고 씨름해 봐도 만족스러운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특히 지금 제가 맡은 신사업은 제품/기술 조직(CPO/CTO)이 아닌 사업 조직(CBO) 산하에 있습니다. 제품보다는 비즈니스의 논리가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는 곳이었습니다. 경력이 이제 만 6년이 된 제가 그 거대한 사업적 맥락과 제품의 디테일을 버무려내기엔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체감했습니다. 결국 '하반기에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겸손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잘난 척하던 제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2.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는 '샌드위치 PO'



이곳에서 제 위치는 참 묘합니다. 공식적으로는 PO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팀장님 아래에서 살림을 도맡는 '암묵적 부팀장'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팀원들에게 일감을 나누고 스프린트를 관리하지만, 정작 결정적인 권한은 제게 없습니다.


이 애매한 경계선이 저를 참 힘들게 합니다. 조금만 의욕적으로 나서면 "너무 앞서 나가는 거 아니냐"는 시선이 느껴지고, 조금만 조심스러워지면 "왜 제 역할을 안 하냐"는 질책이 돌아옵니다. '책임만 있고 권한은 없는' 이 고전적인 직장인의 딜레마를 PO라는 이름표를 달고 겪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위클리를 할 때나, 스프린트 플래닝을 할 때에는 항상 그 '선'을 고민하며 출근합니다.



3. 달라도 너무 다른 문화 충격



제 업무 스타일은 전형적인 스타트업 DNA에 가깝습니다. 빠르고, 솔직하고, 진취적인 것. 회사도 제 그런 면을 보고 뽑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만난 팀원들 중 일부는 제 기대와 너무나 달랐습니다. 보수적인 사고방식, 어떻게든 일을 줄이려는 태도, 갈등을 피하려는 회피형 커뮤니케이션. "이게 효율적이지 않나요?"라는 제 질문은 그들에게 때로 날 선 공격처럼 들리는 모양입니다. 최근 업무 과정에서 생긴 마찰이 며칠간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랑 안 맞는 사람들'과 함께 성과를 내야 한다는 사실이 때로는 숨이 막힐 듯한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에는 주변에서의 이직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직한 지 반년도 안 됐으니 포트폴리오도 따끈따끈하고, 제 스타일을 반겨줄 스타트업은 어디든 있을 것 같거든요. '내 색깔을 죽이면서까지 여기서 버텨야 하나?'라는 현타가 올 때면 당장이라도 탈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금 나가는 건 도망치는 게 아닐까?' 최소한 1, 2년은 부딪혀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게 맞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문화가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닌데, 제가 너무 제 기준만 고집하는 건 아닐까 하는 반성도 듭니다.


이런 고민을 하고 있지만 당장은 출근을 할 것입니다. 4개월 만에 이 거대한 조직을 다 알았다고 말하는 건 너무 성급한 오만일 테니까요. 조금 더 노력해 보고, 상위자와 더 솔직하게 대화하며 해답을 찾아가 보려 합니다. 이 혼란스러운 시간 또한 제가 배워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믿기로 했습니다. 복잡한 고민을 글로 정리하며 문제를 정의했으니, 이제는 다시 PO의 마음으로 돌아가 작은 가설이라도 하나씩 실행해 보려 합니다. 30년 된 항공모함은 느리지만, 한 번 방향을 틀면 그 파급력은 무시무시할 테니까요. 그 변화의 순간에 제가 아주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시 정신줄을 꽉 잡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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