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부끄러움은 늘 우리의 몫인가?
지난 회사 생활을 돌아보려니 재미있는 회사를 위해서 반드시 먼저 이뤄져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회사로부터 존중 받고, 보호 받고 있다는 확신이다.
어릴적, 어떤 할리우드 영화에서 이런 대사를 들은 적이 있다.
"미국은 미국 국민을 단 한 사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스크린을 뚫고 나와 내 온몸에 소름을 남겼다. 실제로 미국은 세상의 끝에 자국민이 홀로 버려져 있어도 기어이 찾아가 구해온다고 한다. 회사에서도 언젠가 이런 말을 들어보고 싶다.
“우리는 직원들을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회사에 큰 변화를 촉구하는 큰 미션이 주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표는 고심 끝에 직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을 홈페이지에 게시했다. 이제 혁신을 거부하는 것은 조직의 큰 발전을 위해 도움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헌신과 희생을 과감하게 요구한다는 것이 골자인 발표였다. 다소 강한 어조였지만 대표로서, 리더로서 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발표였다. 강력한 의지에 이 조직이 혁신의 길을 갈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들었다.
기대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바로 이어지는 문장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참담함과 좌절감이 강하게 들었다. 회사의 발전과 건강한 조직 문화를 위해 다같이 힘쓰자는 전반부의 희망찬 내용을 뒤로하고 말 그대로 급발진을 하고 있었다. 같은 사람이 쓴 거 맞나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회사 내에 반조직적인 여론을 형성하고 사실이 아닌 말을 사실처럼 만들고 퍼뜨려 조직을 위험에 빠뜨린다면 죄시하지 않겠다"
위와 같은 협박성 문장이 후반부 상당 분량을 차지하고 있었다. 대표는 대체 회사 내에서 누구에게 어떤 말을 전해 듣고 그렇게 화가 났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정황상 대부분의 직원은 대략 알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아울러 전후 맥락도 없이 저런 말을 공식 담화문에 넣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부끄러웠다. 마치 북한 방송에서 “남조선 괴뢰 무리가 또 한 번 설쳐 대면 불바다를 만들 것을 선포하는 바입니다!”식의 연설문과 비슷한 느낌이다.
회사의 명운이 달린 상황에서 무려 대표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함량 미달의 담화문이 발표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1. 직원을 뼛속 깊이 무시하고 있다.
"00 하면 죽여버린다!"
언뜻 보면 무서운 말 같지만, 우리가 아주 어릴 때 친구들하고 놀다가 자주 하던 말이다. 진짜 죽인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진심이 아닌, 다만 감정 표현이 서툴러 급하게 튀어나오는 말이다. 그런 말이 회사의 공식 담화문에 번듯하게 들어 있는 것이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체 왜 부끄러움은 이걸 쓴 사람이 아닌 보는 사람의 몫일까? 참 불공평하다. 그리고 이 정도 저 수준의 표현으로 직원들을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는 기묘한 자신감, 그건 곧 직원들 수준을 딱 그정도로만 보고 있는 것이다. 그분이 기억했으면 좋겠다. 당신이 그렇게 무시하는 직원들의 분투로 인해 지금까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고. 만약 우리의 수준이 당신 말대로 그렇게 낮았다면 그건 리더인 그대의 수준이 그만큼이었기에 일어난 결과라고.
2. 이걸 통해 이득을 보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때는, 대개 그 이면에 다른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연예인의 갑작스러운 스캔들 뒤엔 정치권의 더 큰 이슈가 숨어 있는 것처럼. 이 어설픈 협박문을 쓴 당사자이든,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든, 이런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누가 이득을 보게 되는지 생각해 보면 의도는 드러난다.
말 안 듣는 사람을 몰아내고, 말 잘 듣는 '예쁜 사람'을 자리에 앉히기 위한 사전 작업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직원들에게 막연한 공포심을 남긴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나 회사에 불만이 있다. 직원들끼리 모여 회사 욕을 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정치를 잘못하면 대통령도 탄핵당하는 세상인데, 회사의 이런저런 판단과 조치에 대해 불만 한 마디씩 주고 받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다.
하지만 이 담화문 하나로 직원들은 실체 모를 공포감에 휩싸이게 됐다.
‘내 얘긴가?’
‘누가 말을 옮긴 걸까?’
‘혹시 인사상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닐까?’
‘아침에 인사했는데 반응이 없던 이유가…?’
‘휴게실 대화가 들렸을까? 혹시 도청 장치라도…?’
대표가 원한 효과가 딱 이것이었을까?
귀 닫고, 입 다물고 살라는 말.
지금처럼 마음 힘들고 싶지 않으면.
그래도 나는 오늘을 조용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회사가 날 존중하고 보호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은 비상식적인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보다 더 나빠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좋아질 일만 남았다는 말이다. 그 시기가 언제 찾아오느냐의 문제다.
그리고,
누가 그렇게 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그렇게 만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