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세요?"
"왜 야구를 그렇게 좋아하세요?"
어느 날 반짝이는 트윈스 유광 점퍼를 입고 출근했더니 동료가 슬며시 물었습니다. 돌이켜보니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해본 적도, 스스로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도 없었습니다. 그냥 대충 웃어넘겼다가, 문득 ‘이건 글로 한번 정리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매일 하니까요.
야구선수들은 주 5일 근무제가 정착한 시대에도 여전히 ‘주 6일 근무’를 고수하는 사람들입니다. 평일에는 퇴근 후 편히 볼 수 있도록 저녁 경기로, 주말엔 남은 하루를 더 길게 누리라는 의미로 낮 경기로 팬들을 찾아옵니다. (혹서기 제외) 우리는 그저 열심히 일하고, 남는 시간에 그들의 ‘일터’를 보면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 하나! 프로야구 선수들은 월요일에 쉽니다. 그래서 팬들에겐 일요일 경기 결과가 아주 중요합니다. 이기면 월요병 따위는 없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화요일을 기다릴 수 있으니까요. 반대로 일요일 경기를 지면 월요병의 충격은 몇 배입니다.
2. 오늘 져도 내일을 기약할 수 있어서요.
응원팀이 지는 날은 정말 화가 납니다. 아깝게 지면 아깝다고 화나고, 어처구니없이 지면 그건 또 그것대로 슬럼프가 옵니다.
하지만 그 슬럼프는 10분을 넘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도 또 야구가 있으니까요. “내일은 이기겠지.” 정도가 아니라, “내일 두고 보자.” 하며 다시 전의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이 야구입니다.
다른 종목은 한 경기 끝나면 며칠씩 기다려야 합니다. 농구는 연이틀 경기를 하는 ‘백투백(back-to-back)’ 일정이 있긴 하지만, 그건 선수들 체력 소모도 심하고 부상 위험도 커서 거의 예외적인 경우죠. (개인적으로는 이렇게까지 무리하게 해야 하나 이해가 잘 안 됩니다.) 아무튼 전 축구도, 배구도, 농구도 물론 다 좋아합니다. 종목별로 응원하는 팀도 있고요.
하지만… 야구는 ‘사랑’합니다.
3. 못하는 팀이 잘하는 팀을 이길 확률이 다른 종목보다 높아서요.
야구는 참 이상한 종목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다른 종목과 비교해보면 야구에서 약팀이 강팀을 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축구는 꼴찌 팀이 1위 팀을 이길 확률이 거의 없습니다. 팬들도 가끔은 그런 이변을 기대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거의 일어나지 않죠. 그러니까 이변이라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야구는 다릅니다. 정규시즌에서 꼴찌 팀이 1위 팀을 이겨도 '이변'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아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결과로 생각합니다. 한국 프로야구 10개 팀은 나머지 9개 팀과 한 시즌에 16번씩 맞붙습니다.
만약 축구에서 1위와 꼴찌가 16번을 한다면? 작년 시즌 결과를 보니 13승 2무 1패 정도더군요. 거의 압도입니다.
그런데 야구는 10승 6패. 꼴찌 팀도 강팀을 힌시즌에 6번이나 잡습니다. 비록 10번은 지더라도, 그 6번의 이변이 주는 기쁨은 정말 큽니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응원하는 거죠. 도대체 야구는 왜 이런 일이 이렇게 자주 일어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아래에서 말씀드리겠습니다.
4. 무한에 가까운 경우의 수
월드컵 같은 큰 경기에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은 둥글다.”
공이 둥글기 때문에 기적 같은 승부가 가능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야구는 한 술 더뜹니다. 공도 둥글고, 그걸 ‘때리는’ 배트도 둥급니다.
그러니 공과 배트가 맞닿는 순간, 아무도 상상 못 할 수천, 수만 가지의 경우의 수가 펼쳐집니다.
투수가 던지는 공만 해도 종류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직구, 커브, 슬라이더, 투심, 체인지업…
공의 궤적은 위아래, 좌우, 혹은 미세한 흔들림까지 포함해 무한합니다. 공이 둥근 배트의 어떤 면에 맞느냐에 따라 타구 속도와 각도는 완전히 달라지고, 그 공을 처리하는 9명 수비수의 움직임까지 더하면 경우의 수는 정말 계산하기 싫을 정도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경기 중엔 야구를 평생 해온 선수나 심판조차 잠시 멈칫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종종 벌어집니다. 그만큼 바로 판단하기 어려운 상황도 자주 발생하고 그에 따라 규칙도 복잡해서 초심자가 즐기기에 쉬운 스포츠는 아닙니다.
솔직히 초기 진입장벽이 높다는 건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벽을 완전히 넘어야 야구를 즐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저역시 야구를 이렇게까지 미쳐서 보진 못했겠죠. 그냥 장벽 옆으로 살짝 돌아서 들어오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저 역시 어릴 때 그렇게 이 길에 들어왔으니까요.
5. 아빠와의 몇 안 되는 추억
제 아빠는 가정에 그리 충실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썽은 말썽대로 피우고, 집에 있는 돈은 도박으로 다 쏟아부으며 가족들에게 상처만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꿈에 나오면 한 대 치고 싶을 만큼 미움이 가득한 존재였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떤 순간만 되면 아빠가 유난히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함께 야구장 가서 벌떡 일어나 소리치던 모습, 골목에서 글러브 하나씩 끼고 공을 받아주며 “나이스 볼!”을 외치던 그 목소리. 그 장면만큼은 꿈의 힘을 빌려서라도 다시 만나보고 싶습니다. 내가 지금 응원하는 팀도 아빠가 프로야구가 시작되던 1982년부터 응원하던 팀입니다. 아마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야구 팬으로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핏줄을 끊을 수 없듯이, 야구도 그렇게 나와 연결돼 버렸습니다.
특히 트윈스는 유독 긴 암흑기를 보냈죠. 1994년 우승이 마지막 기록이라니… (잠깐 눈물 좀 닦고요.)
그런데 희한합니다. 팀이 이기든 지든, 가끔 야구를 보는 순간 아빠가 생각납니다. 관중석에서 같은 유니폼을 입은 아빠와 아들의 모습이 보일 때면 자연스럽게 아빠와 야구장에 앉아있던 순간으로 시간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거든요. 야구보다 펄쩍 뛰며 기뻐하다가도 ‘지금 아빠도 이걸 보고 있을까?’ 같은 생각이 스칩니다.
야구는 이렇게 예상치 못한 곳까지 마음을 연결합니다. 미움과 상처투성이의 기억마저 경기 앞에서는 잠시나마 치유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어찌 야구를 놓을 수 있겠습니까?
트윈스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에 전례 없는 암흑기를 굉장히 오래 보냈습니다. 1994년 우승한 것이 마지막 우승 기록일 정도니(잠깐 눈물 좀 닦고요.). 문제는 엄청나게 못 했던 때도, 최근 좀 잘하는 때도, 야구를 볼 때 때때로 아빠가 생각난다는 것이다. 우리 팀이 이겨 펄쩍 뛰며 기뻐하면서 '지금 아빠도 이걸 보고 있을까?'라는 생각했다. 야구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곳까지 연결되어 있다. 미움에 가득한 상처투성이 기억도 야구 앞에선 일시적으로 말끔하게 치유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야구를 놓을 수 있겠습니까?
2023년,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시범경기 기간입니다.
정식 경기도 아니고, 그라운드엔 아직 찬 바람이 가득하지만 겨우내 기다렸던 야구를 드디어 다시 볼 수 있는 날이죠. 근무 중에 블루투스 이어폰을 살짝 끼우고 휴대전화를 엎어둔 채로 시범경기를 듣는 이 시간을 사랑합니다. (이 글이 회사원 000의 근무태도를 특정하지 않길 빕니다.)
이러고 있어도 업무 효율이 떨어지진 않습니다.
단… 우리팀이 이기고 있을 때에 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