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이직 중독자가 되어가 (2)
마구 뱉어 놓은 말을 주워 담을 수 없으니 그 말을 현실로 만들어야 했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은 실제로 다른 회사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벼랑 끝에 매달아 놓으니, 준비는 일사천리였다. 그때를 떠올려 보니 즐겁게 회사에 다니는 첫 번째 방법을 찾긴 한 것 같다.
‘회사 다니며 다음 회사 알아보기’
직장인 사이에서 돌고 도는 직장 생활 명언 모음집이 있다. 그중 최고의 문장은 "큰 볼일은 반드시 출근해서 봐라. X 싸면서 돈 번다."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버금가는 강력한 명언을 창조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대위기를 대역전으로 뒤바꾼 파이터가 된 것 같은 생각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틀림없다.
이대로 이직에 성공한다면 연봉은 최소 두 배가 될 예정이었다. 업무가 고되기로 유명한 회사였지만 한껏 치솟을 월급 생각만 해도 즐거워 미칠 지경이었다.
사장님과의 두 번째 면담을 하루 남겨 놓은 어느 목요일이었다. 하루 종일 취업 포털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정보 수집을 하고 가열하게 퇴근했다. 회사 정문을 나서자마자 서류 가방 안에서 울리는 경쾌한 진동 소리.
‘000 님, 00그룹 서류 및 인·적성 전형 합격을 축하니다. 최종 면접일은...’
왜 진동이 그렇게 상쾌하게 느껴졌나 했더니, 진짜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꿈은 진짜 이뤄지는 건가. ‘역시 일단 지르고 봐야 한다니까!’ 나의 의기양양함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면접은 특이하게 그 주 일요일이었다. 역시 대기업 경력직 면접답다고 생각하며. 어깨 뽕을 한없이 채워 올렸다.
다음날 출근길은 더없이 신났다. 부장님이 사장님 일정 확인하고 다시 불러 주신단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환됐다. ‘아 사장실 가서 뭐라하면서 건방을 떨어야 하지’라고 생각하며 설렌다. 며칠 전 이 문을 들어설 때만 해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얗게 됐었는데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면접은 어떻게 됐어요?"
"네 00그룹에 최종 합격했습니다!"
‘뭐라고?’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내 귀를 의심했다. 지난번 면담 이후 내 허언증은 중증으로 발전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춰선 안 됐다.
"그동안 챙겨주시고 기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 그래요....일단 축하합니다."
사장님은 침착하게 축하를 건네시면서도 의아한 표정으로 함께 들어간 상무님과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보셨다. 어색한 공기가 가득 차 넘치고 있었다.
증증 허언증 환자는 그날 그곳에서 인생 중 가장 맛있는 음료로 기억되는 오렌지 병 주스를 단숨에 원샷 때리고 90도의 깊은 목례를 상당히 오랫동안 드리고 거의 날듯한 기세로 회사를 나섰다.
아직 면접도 안 봤지만 난 벌써 00그룹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아니, 반드시 되어야만 했다.
최종 결과를 기다리며 5일간 출근했는데 내 인생 가장 행복한 회사 생활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과 잇달아 점심 약속을 잡고 일정이 허락하지 못한 분들과는 삼삼오오 저녁에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료들과의 소소한 만남의 시간을 진작 가졌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가깝게 지내지 못한 동료들과도 깊은 이야기를 하며 맛있는 음식을 나누니 참 좋았다. ‘아, 이분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아, 저분은 생각보다 더 멋진 사람이었잖아?’
‘좋은 동료들과 사적인 만남 갖기, 그리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동료가 되어 드리기.’
회사를 재미있게 다닐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을 찾았는데 하필 퇴사를 앞두고 찾을 줄이야. 한편 아쉽다는 생각은 쏜살같이 뒤로 사라지고 있었고 이 회사에서의 날도 거의 마지막을 달려가고 있었다.
면접 본 회사의 최종 발표는 마지막 출근날 3일 후였다. 밤마다 약 2주일간의 백수 생활을 어떻게 즐겨야 잘 했다고 소문날까 궁리를 하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요란하지만 반가운 벨 소리가 어느 날 나의 아침을 깨웠다.
‘안녕하세요, 00그룹입니다.’라는 장문 메시지의 제목이 화면을 채웠다.
‘000 님, 00그룹입니다. 아쉽게도 최종 면접 결과 이번엔 저희와 함께 할 수 없...’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당시 느낀 충격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력했던 기억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불합격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래서 허언증이 무섭다. 남을 속이기 위해 시작했지만 결국 나를 속이는 결과에 이르게 되니까. 굳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중증으로 발전한 허언증이 불합격 통보 문자로 인해 단번에 치유된 건 정말 다행이었다.
멍하니 휴대폰만 붙들고 걸터앉아 있었다. 얼마나 기운이 빠져버렸으면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침대 끄트머리에서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는데도 몸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잠시 행복했던 내 일상이 일순간에 증발해 버린 느낌이었다. 침대 끝에서 슬쩍 미끄러졌을 뿐인데 바닥이 보이지 않는 컴컴한 우물속으로 계속 떨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휴대폰이 다시 한번 징 울린다. 퇴직금이 입금되었다. 어쩜 이렇게 타이밍이 절묘한지. 불합격 소식을 듣고 아주 잠깐 이전 회사로 달려가 볼까 생각했었다.
"제가 아무래도 미쳤었던 것 같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등등의 대사를 떠올려 가며.
칼같이 입금된 퇴직금은 이제 회사가 넘어오지 말라고 그어 놓은 군사분계선 같은 것이었다. 회사로부터 한 번에 받은 돈 중 가장 큰 금액 위로 ‘알짱대면 총 맞는다.’라는 글자가 겹쳐 보이는 듯했다.
정말 이상했던 건 그 순간 회사에서의 좋았던 기억들만 떠올랐다는 것이다.
강의를 준비하기 위해 스스로 주말에 출근해서 강의안 만들면서도 행복했다.
마침 주말에 나오신 사장님과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사장님의 귀까지 찢어지는 미소를 보고 더 행복했다.
함께 일하던 동료들과 분위기 좋은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하면서 회사에선 미처 보지 못한 그들의 멋진 모습과 깊은 생각을 느끼며 행복했다.
잘할 땐 잘한다고 칭찬해 주고 못 할 땐 잘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신 팀장님과 부장님의 따뜻한 모습에 분명 행복했다.
일한 만큼의 월급 말고는 받은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회사가 내게 준 행복한 순간들이 정말 많았다.
왜 그땐 알지 못했을까.
회사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을 수 있는 곳이었다.
내게 다음 회사가 한 번 더 허락된다면 그 기회를 헛되이 놓치지 않으리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음 스테이지를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