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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달 Oct 29. 2024

<도도한 생활>을 읽고

어떤 보통의 기준을 따라가기 위해서 엄마는 만둣집 가게 장사가 가장 잘 될 때 나에게 피아노를 사줬다. 거실이 아닌 만두 가게 안에 피아노는 위치했다. 우리 삶의 질이 한 뼘쯤 세련돼진 것 같아 엄마는 무척 기뻐했다. 나는 체르니를 배우고 싶기보단 체르니란 말이 갖고 싶었다. 피아노 할부금이 다 끝날 때 나도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만하면 족했던 것이다. 아빠는 누군가를 보증을 섰고 집안에 차압 딱지가 붙여지기 직전 우리는 피아노를 팔아야 했다. 엄마는 일단 갖고 있자고 하며 서울 지하방 언니가 살고 있는 곳으로 나와 피아노를 보낸다. 피아노는 간신히 지하방에 위치했고 주인은 내려와 피아노를 치지 못하게 한다. <큐티클>에서도 부를 짐작하게 하는 것은 집도 자동차도 아닌 피부라는 말이 나온다. 언니도 치아가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라고 말하고 취업이 잘 될 것 같아 선택한 치기공 공부를 그만둔다. 폭우가 내려 지하방에 물이 가득 찬다. 언니가 공부하는 영어 문제집이 빗물에 퉁퉁 불어 가고 있고 아무리 쓰레받기로 검은 빗물을 퍼내도 소용없었다. 어느새 피아노가 물에 잠겼다. 나는 피아노 뚜껑을 열어 편안하게 피아노를 연주한다.


피아노와 연결지은 문장들은 다음과 같다.


"나는 덩치 크고 내성적인 악기가 처음으로 낸 소리, 완고하고  편안한 그 도-의 울림을 좋아했다.


레는 곁눈질하는 느낌이고 솔은 까치발 선 인상을 줬다. 미는 시치미를 잘 떼고 파는 솔보다 낮지만 쾌활할 것 같았다.


높은음일수록 빨리 사라진다는 것도, 음마다 자기 시간을 따로 갖고 있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니 각 음이 모여 음악이 된다는 건, 여러 개의 시간이 만나 벌어지는 어떤 일일지도 몰랐다.


라를 알게 되는 즉시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두려웠다.


신을 벗고 짧은 잠을 청하던 엄마의 얼굴은 도-처럼 낮고 고요했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엄마를 따라 하느라 피아노 의자 위에 누워 있던 나를 보고 선생님은 라-처럼 놀랐던가 그렇지 않았던가.


이 방에서 이 거리에서 이 시장과 저 공장에서 이 골목과 저 복도에서 그늘에서 창 안에서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 모르게 도-도-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고. 사람들 저마다 자기도 모르게 까닭 없이 낼 수 있는 음 하나 정도는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하고.


도 다음엔 레가 오는 것처럼 여름이 끝난 후 반드시 가을이 올 것 같았지만 계절은 느릿느릿 지나가고 우리의 청춘은 너무 환해서 창백해져 있었다.


도는 방 안에 갇힌 나방처럼 긴 선을 그리며 오래오래 날아다녔다. 가슴속 어떤 것이 엷게 출렁여 사그라지는 기분이었다. 도는 생각보다 오래 도-하고 울었다.


사내는 도-하고 울지 않고 음냐-하고 뒤척였다.


솔 미 도레 미파솔라설  물에 잠긴 페달에 뭉텅뭉텅 공기 방울이 새어 나왔다. 음은 천천히 날아올라 어우러졌다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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