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의 인문학
소제목은 "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라고 쓰여있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책 속의 mansplain 용어를 만든 리베카 솔닛은 비평가이며 인권, 환경, 반핵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녀처럼 걷기를 좋아한 유명인은 루소, 워즈워스 남매, 소로, 제인 오스틴, 버지니아 울프, 간디, 루터 킹 등이다. 그들의 보행이 탐구되고 의식이 되고 사색의 수단이 된다. 걷기 행위에는 배회, 산책, 등산, 순례, 축제, 행진 등이 있다. 이제는 걷기는 특별한 의식이 되었다. 효율성이라는 미명 아래 빠른 기술력으로 걷는 시간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러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화상으로 만날 수도 있고, 집 밖에서는 빠른 교통수단이 우리의 노동 시간을 더욱 효율적으로 쓰게 만든다. 빠른 기술력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자유가 아니고 생산성이다. 따라서 걷는 행위는 비효율적이며 비생산적인 이미지를 가지게 된다. 대중가요 가사 중 "뚜벅이의 사랑"이라는 말이 있었다. 멋진 차를 타고 즐기는 데이트가 아닌 뚜벅뚜벅 걸으면서 즐기는 데이트는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인다. 이제는 걷는 행위는 어쩌면 가난이라는 이미지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걸을 수 없는 환경에는 주목을 하지 않는다. 신도시를 가보면 널찍한 도로와 커다란 공원이 삶의 질을 높이는 듯 쾌적해 보인다. 그런데 걷기에는 효율적이지 않다. 마트를 갈 때에도 차를 운전해야 하고 공원에 가기 위해서도 운전을 해야 한다. 현대 공간은 우리의 소비생활을 효율적으로 하게 만든다. 과거 평민들이 귀족들의 정원에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다. 민주주의는 그 정원의 담을 허물었다. 자연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길 위에서 만날 기회가 줄어드니 민주적 기능도 위기를 맞았다. 건축가 유현준의 <어디서 살 것인가> 책에서도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의 차고는 걷을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그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길은 우리를 연결하고 우리를 사색하고 자유롭게 만든다. 걷는 행위는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행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