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기 전
여행은 언제나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무뚝뚝한 일상에서 건조함을 느낄 때 우리는 기꺼이 낯선 곳으로 떠난다. 셸리 리드의 소설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열일곱 살 빅토리아가 이방인 윌슨 문을 만나 순식간에 사랑에 빠진 것은 낯선 이에 대한 설렘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낯선 장소, 낯선 사람은 스스로 찾아가 탐색하고 인식하는 특별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때까지 해온 일상적인 감각과 사고와는 조금 다른 무엇이 원초적인 긴장과 자유를 준다. 온몸으로 살아가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행복이 그 속에 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남이고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자기 세계에서 벗어남이다. 여행은 예술과도 닮았다. 예술은 나를 표현한다. 나를 탐색하고 타인을 발견하고 행복을 좇는다. 그토록 설명하기 힘든 행복도 예술의 한 부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행, 사랑, 예술은 우리를 충분히 성장시킨다. 그것은 무제한 권리이다.
혼자 떠나는 여행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타셈 싱의 영화 <더 폴: 오디오스와 환상의 문>에서 소녀 알렉산드리아는 악당에게 쫓기는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며 용기를 낸다. 어른이 내지 못하는 용기를 조그만 소녀가 내고 있다. 파울 클레의 그림 <세네치오>가 떠오른다. 세네치오는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림에는 늙음과 어울리지 않는 노란 색의 어린아이가 웃고 있는 듯하다. 어린아이처럼 나이를 든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단한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다. 자신의 인생을 파멸로 끌고 가는 어른 로이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악당에게 쫓기는 불쌍한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아이의 마음이다. 동심은 어리석고 나약한 것이 아니다. 어른이 잊고 있었던 순수하고 대담한 용기이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이상을 믿고 마음이 정하는 대로 행동하면 결국 나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곳은 나를 본연의 나 자신으로 내버려둘 것이다. 나는 아이 같은 용기를 가지고 혼자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여행은 가족이나 친구랑 가는 것이라는 명제를 깨보기로 했다. 자연의 거칠 것 없는 방종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 나에게 미쳤다고 했을 것 같다. 남편 없이 왜 혼자 가냐고 말렸을 것 같다. 보수적인 가부장제와 뼛속 깊이 숨어있는 유교가 여전히 있던 시절, 통금 시간이 10시였던 그 시절에 나는 고명딸이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유럽 배낭여행은 물론이고 해외 연수도 꿈도 꾸지 못했다. 오빠는 가는데 나는 왜 못 가냐며 오랜 기간 투쟁하고 취업을 위해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해외 연수라는 허락은 받았지만 사실 나는 그저 남녀 차별에 대한 반항심으로 말했을 뿐 나 혼자 해외에 간다는 것에 두려움이 컸다. 솔직한 속마음은 안 가도 그만이었다. 결국 사정이 생겨 해외 연수를 가지 못했다. (착오는 억압된 욕구가 의식에 저항하여 일어나는 실수의 전형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결혼하고 가족 여행으로 해외를 몇 번 다녀왔다. 그러니까 나는 혼자 해외를 가 본 적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젊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위험은 줄었고 무엇보다 혼자 가고 싶다는 마음과 아이 같은 용기가 생겼다. 그래도 엄마는 남편이랑 같이 가지, 왜 위험하게 혼자 가면서 고생하느냐며 딸을 위하는 마음으로 반대했을 것 같다.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이 자신의 고난을 예고하자 제자 베드로가 반박하며 대립하는 장면이 나온다. 베드로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이 사랑하는 스승이 고난을 받는다니 걱정이 되는 마음과 함께 자신도 같은 고난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우면서도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마치 딸들이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딸들은 왜 그런 말을 할까. 사랑하는 엄마가 바보 천지처럼 희생만 하는 모습, 자신도 잃고 용기도 잃고 사는 모습에 화가 나고, 같은 여자이기에 나도 엄마처럼 비슷한 인생을 살지 않을까 하는 걱정스럽고 두려운 마음일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살기 싫었다. 당신보다는 가족이 늘 우선이고 항상 근검절약하고 남동생 때문에 공부도 하지 못한 인생을 원망조차 하지 않는 것이 답답했다. 엄마는 나에게 남편 그늘에서 편히 있으라는 답답한 말을 했다. (엄마, 남편 그늘은 별로 시원하지 않거든요.) 그러나 조금씩 나 혼자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줄 때는 누구보다 기뻐하며 동네방네 자랑을 했다. 이 여행은 나를 위한 여행이면서 엄마를 위한 여행도 될 것이다. 엄마가 못한 거, 엄마가 두려워했던 거를 내가 대신해 보아야겠다. 김기태의 소설 <무겁고 높은>에서 딸은 100kg 바벨을 들고 싶어 한다. 딸은 아버지를 닮아 힘이 세다. 딸이 역도를 하는 이유는 바벨을 번쩍 든 후 힘껏 내던지는 그 소리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메달을 따서 올림픽에 나간다거나, 어려운 집 형편에 도움을 주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쓸모 있는 이유는 없다. 나는 그 부분이 무척 좋았다.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히 내던지는 나만의 우월한 성취감, 나도 순례길에서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 세상이 나와 엄마에게 강요하고 교육했던, 나에게 맞지 않는 옷과 내가 스스로에게 강요한 한심한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싶다. 이제 나도 100kg 세상을 들 것이다.
요즘 인테리어, 그림에 미니멀리즘이 유행한다. 삶에도 미니멀리즘이 필요하다. 소비하는 것이 미덕인 초자본주의 시대에 물건을 사지 않는 것은 종교적인 힘까지 필요하다. 순례길은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순례길에서 메고 있는 배낭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인생의 무게라고 한다.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배낭에 물건을 넣다 빼기를 반복했다. 걷는다는 본질을 잊으면 안 된다. 특히 배낭을 메고 걷는다는 사실을 망각하면 안 된다. 걸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발, 스틱, 배낭, 아우터이다. 다른 것들은 헛되게 여겨진다. 이 기본을 신중하게 고르는 과정이 벌써 순례길 시작이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이 물건들과 익숙해지도록 나는 한국에서도 걷고 뛰는 연습을 두 달 동안 했다. 내가 짊어질 인생의 무게는 6kg이 되었다.
작년 10월 늦은 오후 나는 뭔가에 홀린 듯 식탁에 앉아 파리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12월에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나는 3월 24일 파리행 비행기를 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