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한 서점에서 한참을 둘러보다가 맘에 드는 책을 발견할 때, 그 순간이 좋다. 세뱃돈을 군것질로 소비하지 않고 책을 사는 내가 간지 난다고 느꼈다. 어릴 적 엄마가 큰맘 먹고 12개월 할부로 들인 어린이 명작 전집을 가족 중 유일하게 나만 읽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꿀 책을 만나지는 못한 것 같다. 책의 내용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지극히 평범한 독서가, 아니 오히려 조금 느린 독서가였다. 고등학생 때 읽은 통속 소설은 그나마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시험공부하지 않고 몰래 책을 읽는, 사회에 비딱해지는 그 순간이 좋았다. 드디어 입시에 찌든 시간에서 벗어나 원하는 책을 실컷 읽을 줄 알고 선택한 불어불문학과는 불어를 우선 알아야 하는 전공과목이었다. 영어와 더불어 안 되는 불어를 익히는데 4년의 시간이 흐르고 다시 취업대비 책만 읽었다. 남들과 대화하기 위한 책들, 유행하는 책을 읽는 지극히 평범한 독서가였다.
그러다 열정적으로 책을 읽는 시간이 찾아왔다. 용기 내지 못해 배우지 못했던 그림으로 가득 찬 그림책은 나에게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내가 어렸을 때 보지 못한 그림책은 교훈적인 밋밋한 내용으로 가득 찬 명작 전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짧아서 좋았고, 재미있어서 더 좋았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수 있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생겨서 좋았다. 정답을 없기 때문에 오래 생각해야 한다. 또 읽을 때마다 느낌이 달라지고 숨어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을 양육하면서 심심할 때 읽으면 딱 좋은, 읽고 또 읽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림책은 지친 육아의 힐링 시간이자 나만의 시간도 같이 갖게 되는 일석이조였다. 나는 외국 그림책 작가도 알게 되고 다른 책을 찾아보고 그림책 내용으로 학부모들과 이야기하는 풍요로운 시간을 아무 조건 없이 보냈다. 더 이상 유행을 따라가지 않는, 보여주기 위한 독서가 아닌, 좋아서 읽는 조금 비범한 독서가가 되었다.
도서관에서 열리는 글쓰기 강좌나 독서 강좌를 열심히 쫓아다니며 다른 책들을 만났다. 세상에는 보석 같은 좋은 책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 책을 발견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아이와 함께 독서 목록을 정리하고 남들에게 추천도 하고 교과 과정에 맞는 책을 찾아 나의 아이들을 직접 지도도 하며 매일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한 명당 5권의 책을 빌릴 수 있는 대한민국 도서관 시스템에 따라갈 때마다 식구수대로 20권의 책을 실어 날랐다. 내가 이렇게 책을 좋아했나 싶었다. 그러다 아이들이 크면서 다른 책도 읽고 싶어졌다.
도서관의 다른 강좌로 눈길을 돌렸다. 심리 모임을 하고 나를 찾는 여행을 시작했다. 두꺼운 책을 읽는 내가 좀 멋지게 느껴졌다. 일로 연결을 해볼까 용기를 내어 아동센터에서 그림책 읽어주기 봉사를 시작하고, 독서지도사 자격증을 따고 학교 방과 후 수업도 하다가, 프랜차이즈 논술 회사에 입사했다. 아이들이 더 자라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으나 나는 어느새 나이가 들었다. 입사한 회사는 나와 상황이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소위 사회에서 경단녀(경력단절 여성)라고 불리는 그분들과 나는 책을 좋아한다는 열정만 있을 뿐 자신감이 제로이거나 반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키운 경험은 도움이 되었고, 나의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는 점이 고맙게도 장점이 되어 조금씩 회원이 늘어났다. 나의 아이와 남의 아이는 분명 다르지만 그래도 학부모보다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편했고 즐거웠다. 다시 열정의 시간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좋아서 찾아 읽는 책이 아니라 내일의 수업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이었다. 책임감을 가지고 책을 정독하고 실력을 쌓는 동안 조금씩 수업에 대한 회의와 나를 대하는 사회에 실망을 하게 되었다. 프랜차이즈 회사는 나를 독서지도사로 보지 않았다. 회원 수에 따라 회사에 이윤을 안겨주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속품이었다. 모든 책들이 그렇진 않지만 회사의 이윤과 사정에 의해 선정된 책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틀에 박힌 글을 써야 하는 것도 싫었다. 나는 용감하게 또는 무모하게 퇴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