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지금껏 내가 크게 변한 것이 없으니 우리도 크게 다를 것이 없겠지. 돌아보면 지나온 자리에 얼룩만 선연해. 무엇 하나 제대로 쓰이고 그려진 것이 없어서 목이 메어. 그리고 묻고 싶어. 넌 무엇을 기억하고 있을지, 네 기억과 내 기억의 접점은 어디일지. 아무것도 없어서 서러운지, 너무 많이 남아서 서러운지?
멀리서 네가 날 기다리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 왜 이렇게 늦게 온 거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발부터 내달려 버렸어. 도망가 버리면 평생 못 볼 거란 걸 아는데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어. 물음만이 나를 따라오지 못하고 네가 날 기다리던 자리에 오랫동안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관계에 깊이가 없다면 그걸 꼭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고 줄곧 생각했어. 처음엔 쇠사슬 정도의 인연을 욕심냈지만, 실상은 거미줄처럼 덧없었지. 그때부터 지나치게 의미 있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하고 말 앞날들이 읽히기 시작했어.
이런 마음으론 앞으로도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닐 테고 무언가가 될 수도 없겠지. 당신이 내게서 무얼 찾으려 하든 난 무얼 보여 주는 일조차 할 수 없을 거야. 서로 기대하지 않고 서로 기대지 않아도 좋아. 어차피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 간만 보다 짜게 식거든 허울 좋은 핑계들로 안녕하면 그만 아니겠어. 그간 있었던 일 모두가 꿈이었다 말하고 재빨리 새로운 상대를 찾을 거라 생각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