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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다 남긴 술주정들.

by Orchid



아름다운 것과 접하고 난 뒤의 기억을 말로 꺼내는 일은 그 경험을 망치는 일이라 들어왔지만, 홀로 기억을 붙들고 퇴색해 가는 것을 보는 일도 결국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봄, 버스 바퀴에 휩쓸려 흩날리던 벚꽃을 보고 의심의 여지없이 눈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때까지 봐왔던 그 어떤 몸짓보다도 황홀하게 춤추다 시커먼 타이어 아래로 모여들어 이내 짓밟히던 벚꽃잎 한 장 한 장이 내가 본 첫 번째 눈이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Lumix gh4




봄이 되니 시간이 늘어진다. 물 뚝뚝 떨어지는 빨래처럼. 몽롱함 속을 걸으며 비참함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분을 끌어올리려 애쓰는 중이다. 꽃이 피기 시작하면 나는 더 어리석어질지도 몰라. 감정에 취한다는 건 어리석어진다는 것. 더 멍청하고 더 둔감하고 더 흐릿해지기 위해서 취기 속으로 파고들겠지. 얼음이 녹고 만물은 꽃피는데 나는 이대로 사라지는 걸까?





가장 어둡고 가장 낮고 가장 아픈 순간마저 떨어지는 꽃잎 한 장, 한 장과 같은 것들임을 안다. 그것들을 모아 꽃을 피우느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짓밟히게 만드느냐, 결정하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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